민주당, 무엇을 할 것인가

2025-05-13

레닌(1870~1924) 사후에 발간된 그의 전집 중 <여성의 해방>은 실제로는 반여성적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레닌은 동료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던 독일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이 여성 당원들에게 성 문제(피임)를 주제로 토론을 조직했다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클라라, 당신이 저지른 잘못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레닌) 들은 바로는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독서와 토론을 하도록 지정된 저녁 시간에 성과 결혼 문제를 우선으로 취급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소.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초로 무산계급 국가가 전 세계의 반혁명 세력을 상대로 투쟁 중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단결해야 할 이때에 결혼 문제를 두고 토론하느라 바쁘시군요.” 레닌의 입장에서 보면, 체트킨은 혁명 의식을 고양해야 할 시간에 사소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의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한가한 남성’의 입장이며,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남성 마르크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여성은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지만, “여성의 민주주의는 나중에”라는 주장은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현실 정치권을 포함한 범진보 세력의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자”는 입장은 유래가 깊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배제 없는 사회인데도 우리는 늘 민주주의를 다수결 논리로 착각한다. 아니, 이는 착각이 아니라 명백한 이해관계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젠더가 계급, 인종처럼 사회구조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남성과 여성이-협상은 가능할지 몰라도-“단결”해야 할 때는, 없다. 일상생활은 물론 국가 건설, 사회운동, 혁명 상황에서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다르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인간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이중의 억압을 겪거나 남성보다 두세 배 노동을 담당한다.

투쟁 과정에서 여성의 업적을 인정하고 ‘여성을 알아서 배려’하는 정치가는 매우 드물다. 우리 정치사에서 그런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여성이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있으려면 힘 있는 남성에 의해 ‘픽업’되거나 최소한 그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정치권 바깥에서는 여성 정치인을 응원해도 남성 정치인은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엉뚱한 여성’을 뽑는 사례도 많다. 정치와 젠더(성별 제도) 이슈에는 대의(大義)는커녕 기본적인 대의(代議)나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작은 파이를 놓고 여성들끼리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사회적 약자의 분열은 안타까운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여성의 요구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깊고 폭넓은 정치이다. 이른바 사적이라고 불리는 영역과 무의식 그리고 체현(體現)까지 아우르는, 보다 근본적인 역사 창조다.

진보·보수든 여·야든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남성끼리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남성 연대(male bonding) 혹은 적대적 공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 연대에도 어느 정도의 룰이 있다.

계엄, 남성 연대의 ‘파탄’

윤석열 일당의 계엄령 사태, 대행의 대행의 대행의 정치, 고등법원에 의해 제지되긴 했지만 작금의 대법원 행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쿠데타 등은 최소한의 상식도 찾아볼 수 없는 난장판이다. 이때 여성들은 성평등을 말할 뿐 아니라 비상식적인 남성 정치 세력과도 싸워야 하는데, 작년 12월3일 이후의 일상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현재 대한민국의 내란, 내전 사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한 부정의한 남성 연대조차 반칙을 일삼는 이들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다.

인간사 전반의 선택, 즉 무엇이 최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가는 정의의 원칙이 아니라 대개 힘의 원리에 달려 있다. 하지만 광장에서 여성들은 힘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들은 ‘힘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국민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미리 겁먹고 일부 남성 대중의 눈치를 보고 있다. 차선이든 최선이든 민주당에 투표할 의사가 있는 여성이 더 이상 자기 갈등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민주당의 성평등 정책이 필요하다. 민주당이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정당이라면, 성평등 정책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느 약자 집단에나 여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과 사회적 약자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3년 전 이재명 후보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 때 “여성에게 ‘덜’ 혐오적인 후보에게 투표하자”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노골적으로 민주당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민주당? 믿을 수 있는가. 이전의 문재인 정권도 이미지와 달리, 여성 친화적이거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가 아니었다. 트럼프가 재당선된 직후 미국의 라틴계 배우 에바 롱고리아는 “더 이상 민주당은 히스패닉이 당연히 민주당에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에서 만일 민주당이 젊은 남성들을 의식해 젠더 관련 정책을 폐기, 은폐하려 한다면 반면교사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우선, 남성의 투표율이 여성보다 낮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도 남성 76.8%, 여성 77.5%였다. 둘째, 여성이나 남성이나 똑같이 한 표인데 왜 남성의 표만을 의식하는 것일까. 1인 1표라는 원칙도 잊은 모양이다. 남성은 온전한 인간이고 여성은 ‘반쪽 인간(half-person)’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다. 성차별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이다. 셋째, ‘성평등 정책=남성 표 이탈’이라는 고정관념이 실제로 확인·실증된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 사회의 대통령 선거를 좌우하는 가장 큰 모순은 지역, 세대, 남북 문제 아닌가? 만일 젠더 정치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젠더가 주요한 사회적 모순, 인식론으로 자리 잡은 바람직한 현실일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광장의 목소리를 담은 사회대개혁 온라인 종합 페이지 ‘천만의 연결’에서 가장 많이 요구된 의제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는 응원봉을 들고 광장을 주도했던 2030 여성 유권자를 위한 비전을 묻는 질문에 “빛의 혁명 과정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했다. 국민이라는 거대 공동체 모두의 성과다. 모든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다(주간경향 1626호 “광장의 외침은 어디로, 진보 어젠다가 사라졌다”).

논공행상을 행하라

민주당은 여성에게 빚이 있다. 만일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상당 부분 여성의 공이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당연한 이치인데 여성 집단에만 예외여서는 안 된다. 이 후보의 위 발언은 3년 전과 달리 젠더 이슈는 피해 가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여성의 참여는 급격히 높아졌는데, 여성을 위한 정치는 후퇴하고 있다. 작년 12월3일 이후 대선 정국에 이르기까지 광장에서 여성들 특히 20대, 30대 젊은 여성의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광장 자체가 성별화됐다. 또래 남성보다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이에 대한 많은 분석이 이루어졌다.

상대가 누구든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어대명’. 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이재명에서 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인 상황이라면, 민주당에 필요한 과제는 ‘우클릭’이 아니라 겸손과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정책이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지만 윤석열 정권 3년 동안 여성의 삶은 크게 후퇴했다. ‘문제는’ 여성들의 의식이 예전에 비해 크게 진보했다는 사실이다. 현실과 의식의 불일치 속에서 고통은 배가된다.

레닌의 대표적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의 영어 표현을 직역하면 “무엇이 실현되어야 할 것인가”이다. 나는 수동태 표현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할 것인가”는 이미 무엇이 이루어진 상태(to be done)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는 “무엇이 되었다”는 뜻이다.

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 입장에서 내키는 투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기권을 피하기 위해, 단지 황망한 계엄 세력과 더 황당한 정당을 피하기 위해 투표장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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