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 '한국어 마을' 촌장, 다프나 주르 스탠퍼드대 교수

2024-10-09

578돌 한글날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발전 유공자와 세종문화상 수상자 15명을 수상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오늘 행사에서 한글발전 유공 포상자로 옥관문화훈장에 하마노우에 미유키 간다외어대학 부학장, 화관문화훈장에 다프나 주르 스탠퍼드대학교 부교수가 수상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동아시아언어문화학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다프나 주르(한국이름 주다혜) 교수는 미국 미네소타주 베미지시에 위치한 콘코디아 한국어 마을 ‘숲속의 호수’ 촌장직도 14년째 맡고 있다.

‘숲속의 호수’는 비영리단체인 콘코디아 랭귀지 빌리지가 운영하는 14개 외국어 마을 프로그램 중 한국어 마을의 이름이다. 한국의 ‘영어 마을(캠프)’과 비슷한 곳으로 여름방학 동안 2주 또는 4주 프로그램을 통해 미 전역과 해외에서 온 8세~18세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역사를 가르친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학생들은 모두 한국어만 사용하면서 K팝도 부르고 스태프들로부터 궁도·태권도·전통악기 등을 배워요. 식사시간에도 한식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우죠.”

콘코디아 랭귀지 마을은 1961년 독일어 마을로 처음 문을 열었고, ‘숲속의 호수’는 1999년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로스 킹 교수가 주도해 시작됐다. 다프나 교수는 로스 킹 교수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제자다.

“로스 킹 교수님이 ‘여름방학에 이런 언어 캠프를 시작할 건데 함께 해볼 생각이 없냐’ 권유하셨죠. 제가 워낙 캠프 체질이라(웃음) 바로 갈 수 있다고 했어요. 자연을 벗 삼아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니 생각만 해도 좋았죠. 하지만 제안을 받은 1999년 첫해에는 할머니가 아프셔서 갈 수 없었고, 다음해인 2000년도에 합류해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어요.”

주르 교수가 ‘숲속의 호수’에서 스태프로 학생들에게 처음 가르친 것은 태권도였다. 한국어를 시작하게 된 것도 태권도 때문이다. 이스라엘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르 교수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오가며 자랐다. 이스라엘에서 보낸 중학교시절 무술영화 ‘가라데 키드’를 보고 동네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에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어머니 고향인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를 위해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그는 제대 후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에서 제대로 된 검은 띠를 따겠다” 결심하고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93년 12월 무작정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연세대어학당에 등록했다.

“한국에 오기 전 버스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더듬더듬 독학한 한국어가 전부라 진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어학당 수업을 시작하면서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수업에선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라고 존댓말을 배웠는데 거리에 나가서 부딪쳐보니 모든 사람이 다 존댓말을 쓰는 건 아니더라고요.(웃음) 언제, 어떻게 말해야하는지 엄청 혼란스러웠죠.”

‘대학엔 안 갈 거냐’는 어머니의 잔소리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 대학에서 동양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어 전공이 없어 일본어를 전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97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어학당에서 1년6개월간 최고급 과정까지 마치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문학으로 석·박사과정을 마쳤죠.”

박사과정 중이던 2002년 로스 킹 교수와 함께 다시 한국을 방문했고, 이때 한국인 태권도 사범인 지금의 남편을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했다. “한국어 때문에 남편도 만난 거죠.(웃음)” 현재 남편은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일한·오른 두 아들은 매년 여름을 엄마와 함께 숲속의 호수에서 지내며 스태프로 일한다.

한국에 머물 때 어학당을 다니는 것 외에도 태권도, 서예 등을 열심히 배웠던 그는 “관심사를 중심으로 언어를 배우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선생님, 사범님이 지금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너무 알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죠. 눈치로 생존하는 것 말고, 진짜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언어를 배울 때 ‘숲속의 호수’ 같은 몰입형 교육이 정말 중요해요. 교실에서 책으로 공부하는 것 말고, 자신이 정말 관심 있는 것을 일상에서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언어가 진짜죠.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내용은 흘려듣게 되지만 내가 정말 알아듣기 원하고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어느 순간 귀와 입을 트이게 되거든요.”

그는 지금 전 세계 청소년들의 관심사는 K팝과 K컬처라고 했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하루 종일 K팝을 부르고 춤도 추고, 다양한 K컬처를 배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숲속의 호수’ 신청자가 점점 늘고 있어요.”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학생들이 몰려들지만 사실 ‘숲속의 호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하다. 99년 시작한 이래 3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거쳐 갔지만 올해까지 변변한 기숙사 하나 없어 이웃에 위치한 러시아마을의 기숙사를 빌려 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국 기업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이 사재 700만 달러(약 96억원)를 기부한 덕분에 올해 7월 비로소 기숙사 두 동, 강당 겸 식당 한 동, 사무실 한 동을 갖춘 번듯한 ‘집’을 완공했고 제대로 된 집들이 행사도 열었다.

“한류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학생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사실 지금도 30여 명의 스태프와 학생들을 위한 공간은 턱 없이 부족해요(현재는 50여 명만 수용 가능). 여름뿐 아니라 일년 내내 이 공간이 상설 운영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한국 정부와 기업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합니다.”

주르 교수는 “미국교포 3세, 4세들의 한국어 교육도 중요하다”며 “앞으로 이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더 늘려갈 계획”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미국에 빨리 정착하기 위해 영어 교육에만 신경 썼다면 요즘 젊은 세대는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 굉장히 높죠. 한류 때문이에요. 자신들의 뿌리인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교육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은 미래를 위한 더 없이 좋은 투자죠.”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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