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서 43년간을 제 자신과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심과 ‘나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군진(軍陣) 수칙이 힘이 됐기 때문이다. … 남은 인생은 나라를 지키는 일과 조국의 소중함, 국군 임무의 숭고함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겠다.”
1994년 11월26일 국군 역사상 가장 긴 43년7개월 동안 육군 소위였던 조창호씨가 중위 진급 하루 만에 거행된 전역식에서 한 말이다. 포병 소위였던 조 중위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중공군에 잡힌 뒤 북한에 억류됐다가 1994년 10월 탈출한 최초의 국군 포로다. 21세 청춘이었던 용사는 머리에 흰 눈이 내려앉고 수척한 64세 노인으로 ‘귀대(歸隊)’했으나 거수경례하는 절도(節度)와 눈빛에서 뿜어나오는 기백에 많은 국민이 감명받았다. 무엇보다 조 중위 덕분에 북한에 국군 포로가 상당수 존재하며 하루하루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이 드러났다.
국방백서에 따르면 조 중위 이래 2010년까지 귀환 국군 포로 수는 80명이다. 2011년부터는 안타깝게도 한 명도 없다. 1953년 정전 후 남이 보낸 인민군 포로는 7만5823명이었으나 북이 송환한 국군 포로는 8333명에 불과하다. 대북 인권단체인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은 미송환 국군 포로 5만명 이상이 북한에 억류돼 강제노역을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사회, 특히 역대 정부가 국군 포로, 납북자 문제에 둔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조 중위도 성대한 전역식과는 달리 2006년 11월 별세했을 땐 국군장, 육군장도 아닌 재향군인회의 향군장(鄕軍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영웅에 대한 예우 수준에 한숨이 나온다. 국내 생존 국군 포로 6명 중 4명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조 중위가 전역한 11월26일을 ‘국군 포로 기억의 날’로, 2014년 국군 포로 문제가 포함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의 공개일인 2월17일을 ‘북한 인권 증진의 날’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남북 관계 개선도 중요하지만, 보편적 인권과 인도적 문제는 정치를 뛰어넘는다. 전란의 시기, 조국 방위의 의무를 다하다 억류된 국군 포로를 잊지 말자는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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