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력이 만들어가는 한·일 파트너십

2025-12-14

서울 마포구에는 한국 현대사의 두 축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모두 들어서 있다. 박정희기념관과 김대중도서관이다. 이런 물리적 인연을 계기로 최근 두 기관 관계자들이 공동학술회의를 열었다. ‘박정희가 열고, 김대중이 넓힌 한·일 관계’를 주제로 그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산업화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민주화를 이끌었던 대통령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다소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연속성을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두 개의 기둥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 H. 카의 통찰도 이 상황에 잘 어울린다.

박정희가 열고 김대중이 넓힌 길

한국 국력이 파트너십 지속의 키

국력 흔들리면 일본 관심 시들어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으로 전환한 결정적 계기로 기록된다. 많은 이들이 DJ의 정치적 결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결단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달라진 경제적 위상이 있었다. 바로 박정희가 주도한 산업화의 결실 위에서 김대중의 외교적 구상이 실현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강의 기적은 단순한 경제 지표의 변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다시 보게 한 구조적 힘이었다. 산업화 이후 축적된 제조업 경쟁력과 국가 위상이 없었다면 일본이 한국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즉 산업화로 뒷받침된 국력 신장이 DJ·오부치 선언의 근본 동력이었다.

하지만 DJ·오부치 선언이 만들어낸 한·일 파트너십은 선언적 의미를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 국교 정상화가 훨씬 늦었던 한·중 관계조차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지만, 한·일 파트너십은 지난 27년간 단 한 번도 격상되지 못했다. 오히려 위안부·징용 문제 등 과거사 갈등이 반복되며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제자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는 양국 관계가 얼마나 쉽게 감정적 충돌로 치닫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양국은 서로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다. 그렇다면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 더구나 미·중 패권 경쟁이 촉발한 통상 질서 변화는 한·일 양국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동맹조차 거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실주의 외교를 노골화하고 있다. 다자 간 협력은 더욱 중요해졌고, 이런 환경에서 한국은 일본 주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 같은 협력의 전제는 한국의 지속 가능한 경제력 강화다. 이미 1% 안팎으로 떨어진 경제 성장률을 보면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에 들어섰다는 분석도 과하지 않다. 저출산·고령화의 속도와 충격은 일본보다 더 크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아직 일본의 43%에 그친다. 이 격차가 오히려 더 벌어지면 일본은 언제든 한국을 가볍게 볼 수 있다. 양국 관계가 안정적인 지금도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독도를 둘러싼 강경한 발언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우경화 기조의 단면이다. 한국의 국력이 약해질수록 이런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은 계속 국력을 키울 수 있을까.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다. 주요국은 모두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미국은 관세 정책을 무기로 자국 기업 보호에 나서고, 일본은 일관되게 경제 재건에 힘을 쏟고 있다. 중국은 국가 총력 시스템을 5년마다 업그레이드하며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한국은 각종 규제로 기업을 옥죄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인세·원자력·노동시장 등 핵심 경제정책이 180도 급격히 흔들린다.

지금은 기업이 국가를 대신해 싸우는 ‘대리 전쟁’ 시대다. 기업이 이기면 국력이 올라가고, 국력이 올라가야 외교도 힘을 갖는다. 기업이 밀리면 국가 전체의 힘도 약해지고 외교의 선택지도 줄어든다. 결국 한·일 파트너십의 미래는 한국이 강할 때만 가능하다. 박정희가 열어 젖힌 산업화의 기반 위에 김대중이 외교적 지평을 넓혔듯, 앞으로의 한·일 파트너십 지속 역시 한국의 국력 축적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고도 파트너십 2.0은 선언되지 않았다. 그동안 그랬듯 일본 측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탓이 크다. 내년 1월 추진되는 양국 정상회담에서 뒤늦게 ‘이재명·다카이치 선언’이 나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선언 자체보다 실질이다. 경제와 안보 등 협력할 일이 많다. 그 출발점은 한국의 국력 강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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