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No) 재팬’ 운동(2019년),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한 풀 꺾였던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영화, 음악, 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 콘텐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확대, 반일 감정 완화 등으로 새로운 교류의 장이 섰다”고 평가했다.
일본 콘텐트의 활약이 돋보이는 건 영화 분야, 그 중에서도 단연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8월 국내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566만명(11월 30일 기준)의 관객을 모으며, 올해 국내 상영작 중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영화가 됐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해 국내 박스오피스 기록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이밖에 ‘체인소 맨: 레제편’(330만명),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95만명),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75만명) 등도 올해 국내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김봉석 평론가는 “김대중 정권의 한일 문화 개방 정책 이후 어린 시절부터 일본 만화를 접한 세대들이 어른이 되면서, 한때 매니아층의 전유물로 인식됐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제 대중문화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 분야에서는 J팝 팬덤이 커지고 있다. 지난 14일부터 3일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J팝 페스티벌 ‘원더리벳’에는 4만명의 관객이 몰렸다. 지난해 2만5000명보다 60% 가량 늘었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원더리벳에는 범프 오브 치킨(BUMP OF CHICKEN), 스파이에어(SPYAIR) 등 30팀의 일본 뮤지션들이 무대에 섰다. 행사를 주관한 리벳 관계자는 “올해는 킨텍스 3개 홀을 대관했는데, 내년에는 같은 장소 1개 홀을 더 빌려 무대를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형 아티스트들의 내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후지이 가제의 고척돔 공연, 지난 3월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요네즈 켄시 등의 공연은 전석 매진됐다. 올 9월 처음 한국을 찾은 호시노 겐은 첫 내한에 이어 내년 2월에 진행되는 콘서트도 전석 매진시켰다.

공연이나 방송 분야에서도 일본 콘텐트 진출이 이어지고 있다. 내년 1월 7일 무대에 오르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원작의 음악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1차 티켓 오픈 동시에 약 3만석 전석이 매진됐다. 오는 2월엔 일본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 겸 연출가인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허점의 회의실’을 원작으로 하는 ‘비밀통로’가 개막, 배우 김선호 등이 연기를 펼친다. 가수 성시경과 ‘고독한 미식가’의 주연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가 서로의 맛집을 소개하는 ‘미친맛집(넷플릭스)’, 한일 합작 드라마 ‘내남편과 결혼해줘(tvN)’ 등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공개돼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이 같은 일류(日流)의 배경으로는 글로벌 콘텐트 플랫폼 확대가 가장 먼저 꼽힌다. 조규헌 상명대 한일문화콘텐츠전공 교수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를 통해 한국과 일본 콘텐트가 동일 선상에 놓이고, 일부러 파일을 다운 받아야 하던 예전보다 손 쉽게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며 진입 장벽이 확 낮아졌다”며 “수많은 글로벌 콘텐트 중에서도 문화적 동질성이 큰 일본 작품이 더 많은 선택을 받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동으로 콘텐트가 추천되는 알고리즘 기반의 시청·청취 환경도 J콘텐트 영향력 확대에 한몫했다. 예컨대 체인소 맨을 본 관객이 이 영화 OST ‘아이리스 아웃(IRIS OUT)’을 알고리즘을 통해 듣게 되며 가수 요네즈 켄시에 입문하는 식이다.
일본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을 기획해 온 타키엘의 관계자는 “틱톡, 유튜브 쇼츠 등 숏폼 콘텐트는 J팝의 특정 구간이나 유명 애니메이션의 OST를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있으며, 각종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는 개인화된 알고리즘으로 사용자의 취향에 맞는 일본 음악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잠재적 팬층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일 감정이 과거보다 완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조규헌 교수는 “노 재팬 운동 이후 오히려 정치와 문화를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인식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됐다”고 말했다.

앞으로 한일 간 문화 교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이제 한국과 일본의 문화는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계”며 “국내에서도 J팝 밴드의 스타일을 표방하는 ‘QWER’ 같은 팀이 나오고, 국내 아이돌 ‘아이들’이 만든 J팝 스타일의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가 역주행하는 등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한 공연 기획 관계자는 “일본은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문서화와 정해진 절차를 중시하는 반면 한국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면이 있어서 이해 충돌이 생기거나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할 때도 있다”며 “과거사 리스크 등도 여전히 크게 느껴지는 장애물”이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