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주인공인 이 사진, 스트라빈스키 ‘인생 초상’ 됐다

2025-02-07

‘환경 초상’의 개척자, 아놀드 뉴먼 사진전

오는 3월 23일까지 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서 ‘시대의 아이콘: 아놀드 뉴먼과 매거진, 1938-2000’ 전시가 열린다. 2023년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AGO)에서 시작한 해외 순회전으로, ‘환경 초상’이라는 획기적인 초상사진 제작 방식을 개척한 사진가 아놀드 뉴먼이 1938년부터 2000년까지 작업한 작품 200여 점을 소개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것은 사진가 한 사람의 작업을 단순 나열한 것이 아니라, ‘라이프’ ‘하퍼스 바자’ ‘홀리데이’ 등 뉴먼의 작품에 미친 당대 잡지들의 영향력과 상호보완적 관계를 함께 조명했다는 점이다.

위에 러시아 출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차이가 있다면, 한 장의 사진에선 피아노가 중앙을 차지하고 스트라빈스키는 왼쪽에 조그맣게 자리했다.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에는 스트라빈스키가 중앙에 있다. 지금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들은 어느 사진을 더 좋아할까.

1946년 ‘하퍼스 바자’의 아트 디렉터이자 편집자인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는 사진가 아놀드 뉴먼에게 스트라빈스키의 사진촬영을 의뢰했다. 훗날 뉴먼은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악기 전체 혹은 부분을 촬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피아노의 형태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아노의 강렬한, 단단한, 날카로운, 선형적인, 그 강렬하고 냉혹한 아름다움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의 반향이었다. 이를 되뇌며 나는 피아노를 사용하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감의 원천이자 창작 무대였던 잡지

뉴먼은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B플랫 기호처럼 보이도록 연출함으로써 인물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고, 독자에게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음악은 하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원래 이 사진은 피아노 전체와 의자에 앉은 스트라빈스키의 다리까지 보이도록 넓게 촬영한 사진을 뉴먼이 상단만 보이도록 크롭(사진의 일부를 잘라내는)한 것이다. 하지만 브로도비치는 뉴먼이 선택한 이 사진을 잡지에 싣지 않고, 다른 사진을 게재하면서 그 이유를 “스트라빈스키가 너무 작게 나왔다. 이 사진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사진이 너무 훌륭하다”고 애둘러 설명했다.

자기 작업의 저작권을 가진 뉴먼은 이후 자신이 선택한 사진을 194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 선보였고, 같은 해 ‘라이프’ 잡지에도 게재했다. 결론적으로 이 사진은 스트라빈스키의 여러 기사와 홍보에 사용되면서 스트라빈스키를 대표하는 사진이자 뉴먼의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됐다.

뉴먼은 당시 잡지 아트 디렉터가 자신의 선택을 거부한 것을 두고 꽤나 속상해했다. 하지만 뉴먼은 ‘하퍼스 바자’ 게재에선 브로도비치의 선택을 존중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편집은 잡지사의 몫이다. 사진가가 여러 장의 사진을 최우선으로 선택해 추천하지만, 잡지에 실릴 사진의 최종 선택은 편집자와 아트 디렉터, 편집장이 한다. 이 룰은 지금도 통용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아트 디렉터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에 대한 존중도 있었을 것이다. 브로도비치는 20세기 편집디자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다. 1930년대 미국 출판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데 공헌한 사람으로, 오늘날까지도 그의 감각적인 편집 디자인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다. 사진 2처럼 여백의 미를 중시하고, 잡지 양쪽 페이지에 사진과 텍스트가 서로 대칭되도록 배치하는 레이아웃은 브로도비치의 참신하고 획기적인 편집 디자인에서 시작됐다. 특히 브로도비치는 사진과 디자인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아트 디렉터로 리처드 아베돈, 어빙 펜 같은 사진가들을 유명인으로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뉴먼은 절친인 사진가 벤 로즈를 통해 브로도비치와 가까워졌고, 브로도비치 또한 역량 있는 신인 사진가를 발탁하면서 두 사람은 사진가와 아트 디렉터로 상호보완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니 뉴먼은 스트라빈스키 사진에 대한 브로도비치의 선택을 충분히 존중했을 것이다.

사실 잡지는 뉴먼의 작업에서 아주 중요한 무대였다. 1948년 ‘포춘’의 의뢰로 촬영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1968년 ‘홀리데이’의 의뢰로 촬영한 조지아 오키프 등의 초상사진처럼 뉴먼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다수의 사진들은 잡지사의 의뢰로 제작됐다.

AGO의 큐레이터 탈-오르 벤-초린과 소피 해킷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전역에서 판매된 ‘하퍼스 바자’ ‘세븐틴’ ‘포춘’ ‘라이프’ ‘룩’ ‘홀리데이’ 같은 대중 잡지들은 뉴먼의 사진을 실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좋은 교육 자료이자 영감의 원천이 됐고, 그의 야망을 북돋워주며, 평판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또한 두 사람은 “사실 뉴먼은 잡지가 자신에게 더 많은 기회와 수익을 가져다주고, 자신의 작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게 해주며,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이미 잘 인지하고 있었다”며 “잡지사의 신용과 넉넉한 예산을 바탕으로 촬영하고 싶은 인물과 장소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화려한 세트를 제작할 수도 있었기에 뉴먼은 적극적으로 잡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문화사 관통하는 ‘시대의 아이콘’ 초상들

이번 전시 ‘시대의 아이콘: 아놀드 뉴먼과 매거진, 1938-2000’이 다른 사진전과 차별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가 아놀드 뉴먼의 커리어에 미친 잡지의 핵심적 역할과, 그의 작업이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북미와 서유럽의 사진사에 미친 폭 넓은 영향을 연계해 스토리를 흥미롭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물론 뉴먼에 대한 잡지사들의 러브 콜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뉴먼은 파블로 피카소, 존 F 케네디 등 수많은 유명인을 촬영하면서 ‘환경 초상’이라 일컬어지는 획기적인 초상사진 제작 방식을 개척했다. 뉴먼은 대상 인물을 촬영할 때 그들의 집이나 작업실, 혹은 직장 사무실처럼 개인적인 공간에 앉아 포즈를 취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인물의 성격이나 전문 분야를 나타내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는 뉴먼이 모든 요소들을 세심하게 연출한 결과다. 즉, 촬영 전에 인물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계획함으로써 인물과 인물의 공간을 충분히 분석했기에 가능한 사진들이다.

예를 들어 피에트 몬드리안의 초상사진에서 캔버스와 붓은 보이지 않지만 배경이 된 문과 벽의 수직 교차가 몬드리안의 작품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을 촬영할 때는 그의 서재를 배경으로 했는데, 오닐의 개인 수집품인 원주민의 드럼을 화면 왼쪽에 배치했다. 이는 공간의 균형감을 위해서도 매력적인 장치였지만, 연극 매니아들이라면 쉽게 눈치 챌 만한 오닐의 1920년 작품 ‘황제 존스(The Emperor Jones·미국의 아이티 점령을 비판하는 정치적 입장을 표방했다)’에 대한 오마주였다.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무형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인물을 촬영할 때도 뉴먼의 시도는 선구적이었다. 물리학자 알베르 J 리브샤베르 박사의 초상사진을 찍으면서 뉴먼은 칠판 위에 그래픽 도형과 숫자들을 가득 채우고 하단에 박사를 배치한 후 머리에 손을 얹는 자세를 취하게 해서 칠판의 표식들이 마치 박사의 내면세계를 시각화한 듯한 효과를 냈다. 칠판이나 화이트보드 등을 이용한 이런 류의 사진이 지금은 새로울 것 없지만, 그 시작은 뉴먼이었다.

의자 등받이가 날개인 듯 보이는 마르크 샤갈의 표정은 꿈꾸는 소년처럼 온화해 보인다. 붓과 페인트 통이 어지럽게 널린 앞에서 미간을 찌푸린 잭슨 폴록의 표정은 예민해 보인다. 전시를 보는 내내 이미 알고 있는 유명인의 초상 앞에선 고개가 끄덕여지고, 모르는 인물의 초상사진 앞에선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탐구욕이 솟는다. ‘환경 초상’이라는 단어는 낯설지만 아놀드 뉴먼이라는 사진가의 열정과 역량이 얼마나 촘촘하고 두터운지, 그의 집요함이 만들어낸 결과 앞에서 줄곧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개인 작업으로 혹은 의뢰를 통해 50년간 촬영한 인물사진은 우리 시대의 단면, 즉 정치·음악·건축·문학·정신 그리고 특히 예술을 관찰하고 기록한 대단한 작업이었다.” 아놀드 뉴먼의 말처럼, 다양한 장르의 인물 사진들을 통해 시대를 관통한 문화사의 궤적을 쫓아가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