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2019년 서울 마포구의 다세대 빌라 한 동을 매입했다. 매수대금 44억원 중 A씨가 마련한 현금은 4억5000만원. 나머지는 16개 호실을 전부 전세 놓아 충당했다. 주택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일단 건물을 사두고, 차근차근 돈을 모아 전 호실을 월세로 돌린 뒤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A씨의 ‘월세화 계획’은 예상보다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재계약 시점이 도래한 2023년 ‘전세금반환보증보험’이 빌라 전세 계약의 ‘필수 조건’으로 떠오르면서다. A씨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기준인 ‘공시가격 126%’에 보증금을 맞추고 나머지 금액은 월세로 돌리는 ‘반전세’ 계약을 맺고 있다.
“전세사기 이후로 HUG 전세금반환보증보험이 안 되는 집은 아예 쳐다보지를 않아요. 무조건 시세의 126%로 맞춰야 하는 거에요. 반전세로 돌리니 이사를 가겠다던 세입자들도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전셋집을 찾기 어려워 계약을 연장하고 있어요.”
지난해 5월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전세금반환보증 가입기준을 강화한 뒤로 A씨가 내려야 했던 전세보증금(역전세) 규모는 총 2억8000만원에 달한다. A씨는 본인이 실거주하고 있던 아파트를 전세로 내주고 그 보증금으로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돌려주고 있다.
역전세로 인한 A씨의 자금 부담은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느슨한 전세보증 발급으로 역대급 자금난에 빠진 HUG가 보증 기준 추가 강화를 예고하면서다. 전문가들은 이로 인한 빌라 시장의 ‘월세화’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지만, 시장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증가입 조건 ‘공시가격 126%→112%’로
현재 빌라 세입자가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가입하려면 보증금이 ‘공시가격의 126%’ 이내여야 한다. 지난 5월부터 반환 보증에 가입할 때의 빌라 가격은 공시가격의 140%로 산정하고, 담보인정비율(선순위 채권과 전세보증금을 합친 부채 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90%까지 허용(140×90%)하는 것으로 기준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기존 가입 조건은 ‘공시가의 150%’였다.
HUG는 반환보증 가입 기준을 더 조이겠다고 했다. 손명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최근 HUG로부터 제출받은 ‘전세보증 근본적 개선대책'에 따르면, HUG는 담보인정비율을 현행 90%에서 80%까지 추가 하향하겠다고 밝혔다. 선순위 채권이 집값과 같은 경우(100%)까지 무리하게 보증을 발급한 것이 대규모 보증사고와 역대급 손실로 이어졌다는 문제의식이다. HUG에 따르면, 전체 사고액 중 부채비율 80% 초과 구간의 사고율은 84.6%에 달한다.
뒷수습에 나선 HUG로 인해 임대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HUG가 담보인정비율을 80%까지 줄이면 보증가입 한도는 ‘공시가격의 112%’까지 낮아진다. 기존 2억80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던 A씨의 투룸 빌라는 올해 5월부터 2억7720만원으로 보증금을 낮춰야 보증 가입이 가능했는데, 앞으로는 2억4640만원까지 떨어져야 한다. 한 채당 3360만원의 역전세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 채가 아닌 여러 채를 임대하고 있는 집주인들은 돌려줘야 하는 금액이 수억원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만약 내년도 공시가격이 하락한다면 피해는 더 커진다. 임대인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자 HUG는 집값 산정 시 공시가격 뿐 아니라 HUG 공인 감정평가법인이 산출한 감정가도 허용하겠다는 ‘중재안’을 내놨다.
하지만 임대인들은 감정평가가격이 ‘공시가격 126%’를 적용한 금액과 차이가 크지 않다는 입장이다. 강희창 비아파트총연맹 회장은 “감정평가 수수료가 공시가격 1억원 기준 40만원으로 비싼데다, 유효기간이 6개월로 짧다는 점도 문제”라고 했다.
HUG 관계자는 “임대차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므로 담보인정비율 추가 하향은 신규 보증에 한해 충분한 유예기간을 두고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역전세로 인한 타격…약한고리일수록 더 크다
임대인들은 보증보험 제도가 빌라 전세시장의 ‘뱅크런’을 유발하고 있다고 본다. 기존에는 보증보험 가입 가능여부와 무관하게 시장 흐름에 따라 시세가 형성됐는데, 전세사기 이후에는 정부가 설정한 보증가입 상한선이 시세가 되면서 시장의 자연스러운 순환이 멈췄다는 것이다.
보증보험 가입 조건이 강화되면, 기존에 전세로 들어가있는 임차인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도 커진다. 임대인이 역전세가 난 금액만큼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보증금 전액을 돌려받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같은 타격은 저렴한 빌라에 살고 있는 세입자일수록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문윤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지난 9월 발간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제도 개선방안’에 따르면, 반환보증에 가입하지 못하는 ‘전세가율 126% 이상 주택’의 평균 공시가격은 1억3000만원으로, 대부분이 3억원 미만의 저가주택이었다. 공시가격 대비 전세가율이 주택가격이 낮을수록 높아지는 현상도 확인됐다.
강 회장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은 ‘무리한 갭투자’를 했냐고 (집주인을) 비난 할수 있어도, 전세보증 확대와 주택임대사업자 장려책을 폈던 정부는 그래선 안 된다”며 “기존 전세시장에 들어있는 임대인과 임차인을 위한 퇴로를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이 일종의 ‘뉴노멀’이 된 것을 자연스러운 시장변화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2022년부터 불거진 전세사기 사태로 ‘보증금 미반환’이라는 전세 제도의 리스크를 체감하게 된 만큼, 세입자들이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주택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윤성진 국토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보증보험 가입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공공기관인 HUG가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주택이라고 판단한 것”이라며 “세입자가 해당 주택의 보증금 미반환 리스크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공공이 일종의 기준선 역할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했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이 비아파트 전세시장의 ‘뉴노멀’로 자리잡으면서 순수 전세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 비아파트 임대차 시장이 월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는 것이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통계 시스템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수도권 연립·다세대 임대차 거래 중 월세 비중은 47.7%로 전년(39.5%) 대비 8.2%포인트 올랐다. 단독·다가구 유형에서도 월세 비중이 70.1%로 전년(66.3%) 대비 3.8%포인트 증가했다. 같은 기간 수도권 아파트 월세 비중은 42.5%로 전년(44.2%)보다 1.7%포인트 내려간 것과 대조적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월세가 상승하며 단기적으로 세입자의 주거비 부담이 증가할 순 있다. 한국부동산원이 조사한 지난달 서울 연립다세대 월간 월세가격지수는 104.78, 단독주택은 102.96이다. 두 지수 모두 2015년 6월 월세 통계가 개편된 이후 최고치다. 빌라 전세 수요가 아파트 전세 수요로 옮겨가며 아파트 전셋값이 올라가는 부작용도 해결해야 할 숙제다.
전문가들은 집값과 전셋값이 거의 비슷한 비아파트 시장은 전세보다 월세로 전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지적한다. 송인호 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비아파트 전세 수요자 대부분이 서민층인 것은 맞다”면서도 “전세가 저렴하다는 인식에는 보증금 미반환 등 전세에 대한 리스크 비용을 계산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세 대출을 줄이고 월세를 늘리되 월세가 늘어나는 폭에 대해서는 5% 상한 룰을 적용하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