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의 생일이었다. 분홍 꽃이 앉은 케이크 위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친구들의 떠들썩한 축하 노래를 뒤로 하고 촛불을 껐다. 그리고 소주잔에 진로 포도주를 채웠다. 잔과 잔이 만나 울리는 맑은소리를 따라 액체가 찰랑거렸다. 은밀한 비밀을 숨긴 듯한 붉은색, 게다가 달짝지근한 맛이라니.
소주에 에이드 분말을 타서 만들던 레몬 소주와 체리 소주는 약간의 인공적인 향이 났지만, 색이 이쁘고 달콤해서 좋았다. 얇게 썬 생 오이를 넣어 싱그러운 향을 자랑하던 오이 소주도 꽤 매력적이었다. 엄마가 포도에 설탕과 소주를 넣어 담근 것도 있었지만, 진로 포도주는 태생부터 달랐다. 자신만의 고유한 병에 들어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달콤한 와인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생각보다 자주 만난다. 설탕으로 당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놀라는 이도 제법 있다. 당분을 첨가하지 않고도 천상의 단맛을 선사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모스카토 와인이다. 잘 익은 포도를 압착해서 얻은 과즙을 큰 탱크에 넣고 발효를 시작한다. 알코올이 5~7도에 도달하면 온도를 낮춰 당분이 모두 알코올로 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덕분에 도수는 낮고 단맛을 지닌 와인이 생산된다. 양조 과정에서 생겨난 이산화탄소 일부가 와인에 녹아들면 약간의 기포와 독특한 질감을 지니기도 한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Asti)가 대표적이다.
익은 포도를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까치밥처럼 열매가 나무에서 마르면서 당도는 점점 올라간다. 수분이 빠지고 쪼글쪼글해지면 그때 수확해서 와인을 양조한다. 늦수확은 가을에서 겨울까지 대기가 건조하고 일조량이 많은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독일의 슈페트레제(Spatlese, 드라이한 와인을 생산할 수도 있다), 프랑스 알자스의 방당주 타르디브(Vindanges Tardives), 신세계에서 생산하는 레이트 하비스트(Late Harvest)가 있다.
꽁꽁 언 음료를 상온에 두면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진한 즙이 먼저 흘러나온다. 각 성분의 어는점이 다른 덕분이다. 나무에서 언 포도를 즙으로 만들어도 결과는 같다. 포도를 수확하지 않은 채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영하 7~8도의 혹한이 되면 기온이 낮은 새벽이나 이른 아침을 이용해 수확해서 바로 압착한다. 얼어붙은 수분은 빠져나오지 못하는 덕분에 농축된 과즙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양조하면 캐나다의 아이스 와인(Ice Wine), 독일의 아이스바인(Eiswein)이 된다.
포도를 병들게 하는 방법도 있다. 귀하게 부패한다는 의미의 귀부 균(Noble Rot)은 곰팡이의 일종이다. 주로 껍질에서 자라며 포도에 작은 상처를 낸다. 과육의 수분은 상처를 통해 빠져나가고, 당도는 점점 올라간다. 이렇게 귀부병에 걸려 쪼글쪼글해진 포도로 양조하면 귀부 와인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새벽은 곰팡이가 잘 생기도록 습도가 높아야 하고 낮은 고온 건조해서 상처를 통해 수분이 증발할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소테른(Sauterne), 독일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 헝가리의 토카이(Tokaji) 모두 귀부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다음은 말린 포도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수확 후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 송이째 놓아둔 채 자연 건조시켜 건포도처럼 만들면 당분이 농축된다. 이를 이용해 만드는 대표적인 스위트 와인은 그리스의 빈 산토(Vin Santo)와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의 레치오토(Recioto)를 들 수 있다. 또 발효 도중에 도수가 높은 주정을 첨가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양조하면 포도의 당도가 그대로 유지되며 도수 또한 높은 와인이 완성된다. 포르투갈 지역의 포트와인을 들 수 있다.
며칠 전 집 앞 슈퍼마켓에서 진로 하우스 와인이 아직도 생산되는 것을 보며 첫 레드 와인의 추억이 떠올랐다. 깔깔거리던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분위기, 한껏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스무 살로 한 번쯤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느꼈던 달콤함이 와인의 맛뿐만 아니라 젊음이 뿜어내는 향기임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다면, 삶이 더 아름다웠을까.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11월의 끝자락에서 오래된 기억의 한 페이지를 펼쳐본다.
송시내 수필 쓰는 나무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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