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목 받은 ‘베링해협 해저터널’
트럼프, 푸틴 특사 제안에 “흥미” 화답
정상회담 취소 탓 논의 진척은 안 돼
120년 전부터 양국 해빙무드 때 등장
당시 평화 명분 외 실익 없어 ‘제자리’
동아시아∼북미 루트 세계무역 중심돼
육로 생기면 물동량 대거 흡수 가능성
운송비용·시간 감소 등 경제적 이점 커
토건기술도 진화… 안보문제는 걸림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회담 성사 소식으로 미·러 관계 개선 기대가 커졌던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러시아의 키릴 드미트리예프 해외투자·경제협력 특사 겸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러시아 국부펀드) 대표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 흥미로운 게시물을 올렸다. 러시아 영토 시베리아와 미국 영토 알래스카를 연결하는 베링해협 터널 제안이다. 드미트리예프 특사는 “베링해협을 통한 미·러 연결이라는 꿈은 1904년 시베리아∼알래스카 철도부터 2007년 러시아 측 계획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이어진 비전을 반영한다”며 “푸틴·트럼프 터널은 철도 화물 운송으로 공동 자원 탐사를 가능하게 하고, 미·러 공동 사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할 것”이라고 썼다.

놀라운 부분은 러시아 측이 ‘푸틴·트럼프 터널’이라 이름 붙인 이 제안에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화답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워싱턴 백악관 오찬회동에서 베링해협 터널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흥미로운 생각”이라며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심지어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해당 제안에 대한 의견을 묻기까지 했고,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고 답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관련 해답 도출에 실패해 부다페스트 회담이 취소되며 베링해협 터널 관련 논의도 다시 사그라졌다. 다만, 이번 일로 베링해협 터널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프로젝트임이 확인됐고, 이 오래된 구상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됐다.

◆평화의 상징에서 경제의 핵심지로
드미트리예프 특사가 게시물에서 밝혔듯 베링해협 터널은 제정 러시아 시대인 1904년 이래로 무려 120여년간 이어져 온 오래된 프로젝트다. 베링해협은 최단거리가 85㎞, 깊이는 35∼50m에 불과해 다리나 터널 등을 통한 육로 연결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 20세기 초반 이후 세계 정치를 양분했던 두 강대국을 육로로 연결해 평화 체제를 영구히 한다는 명분 아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해빙 무드일 때마다 논의가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안정되지 못했고, 평화라는 명분 외에는 이렇다 할 실익이 없었던 탓에 터널 건설 추진은 진전되지는 않았다.
21세기 들어 국제 무역 환경이 바뀌었다. 20세기와 달리 유라시아 대륙 동부와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가 핵심 교역로가 됐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동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태평양 루트의 해상컨테이너 운송 물량은 2820만TEU로, 아시아∼유럽 구간 물동량인 2420만TEU를 앞섰다. 유럽∼북미를 잇는 대서양 루트는 850만TEU에 불과했다. TEU란 20피트 길이인 표준 컨테이너 1개를 기준으로 하는 운송 용량 단위다.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세계적 산업국가들이 모인 동아시아와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북미를 연결하는 무역 루트가 이미 세계 무역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만약 베링해협이 육로로 연결될 경우 해상과 항공에 의존하던 물동량을 상당 부분 흡수할 수 있다. 북미 서부가 아닌 뉴욕 등 동부 지역의 경우 파나마운하를 거치는 기존 운송경로보다 베링해협을 거치는 육상 경로가 더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예상 가능한 이점이 확실하기에 경제적 이해관계에 밝은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제안을 흥미롭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알래스카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 시절부터 천연자원 개발과 함께 물류 중심지로도 집중 육성해온 지역이다. 이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집권 1기 시절인 2020년 신설이 승인된 알래스카와 캐나다 앨버타주를 잇는 2570㎞ 길이의 철도 노선 ‘A2A’다. 만약 베링해협 터널 구상이 현실화할 경우 A2A는 순식간에 북미와 아시아·유럽을 잇는 노선으로 바뀌고 알래스카는 철도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A2A는 태평양 연안 최북단을 잇는 물류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주목받고 있으며, 베링해협을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직접 연결하는 거대한 교통망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까지 기대받고 있다”고 평했다.
또한, 이 경우 알래스카는 최근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북극항로의 중요 거점으로까지 부상할 수 있다. 러시아는 최근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활용도가 커진 북극항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시베리아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티아는 “이 프로젝트는 북극 지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의 협력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전했다.

◆사라지는 기술적·경제적 제약
물론 베링해협 터널 제안이 현실로 이어지려면 여전히 많은 난관이 해결돼야 한다. 100여년간 터널 건설은 기술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토건 기술의 발전과 베링해협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섬인 다이오메드 제도의 존재로 극복 가능해졌다. 알래스카에서 다이오메드 제도까지의 거리는 약 44㎞, 시베리아에서는 약 40㎞로 영국 남단 도버와 프랑스 서부 칼레를 연결하는 채널 터널의 해저 부분 길이인 37.9㎞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채널 터널이 1994년 개통된 것을 생각하면 현대기술로 다이오메드 제도를 경유하는 터널 건설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평가다.
터널 건설 현실화를 가로막아온 더 큰 장애물은 비용 문제다. 그동안 베링해협 터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최소 650억달러(약 94조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됐다. 이와 관련해 드미트리예프 특사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향해 쓴 엑스 게시물이 주목받고 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베링해협 터널 제안과 별도로 게시물을 올려 머스크 CEO가 보유한 인프라 건설업체 보링 컴퍼니의 신기술을 활용하면 터널 건설 비용을 80억달러(약 11조5800억원) 미만으로 대폭 줄일 수 있다면서 “함께 미래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보링 컴퍼니는 머스크 CEO가 2017년 설립한 스페이스X의 자회사로, 터널 굴착 속도의 표준화·공정 단순화 등으로 시간과 직·간접 비용을 크게 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안보 문제다. 터널이 러시아와 미국을 직접 연결하는 만큼 미국의 안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전하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갈등도 주기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현재는 해당 논의 진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베링해협 터널이 가지는 경제적 가치가 확고한 만큼 베링해협 연결 구상이 사라지지 않고 수면 아래 머물다 미·러 관계가 개선될 때마다 언제든 급부상할 수 있는 여지는 상당하다. 터널이 가지는 평화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여전히 살아 있는 데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최근 글로벌 무역갈등으로 훼손된 글로벌 공급망을 되살린다는 명분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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