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에서 내려와

2024-09-26

진영숙 수필가

‘또각또각’ 구두와 지면이 맞닿으며 경쾌한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왠지 모르게 나를 설레게 한다. 처음 투피스 정장을 하고, 구두를 신고 면접 보러 가던 날이 생각난다. 두려움과 기대감, 두 감정이 공존한다.

구두를 신으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꼿꼿해지고 어깨가 펴진다. 구두를 신은 사람의 걸음걸이는 당당하다. 그의 행선지가 궁금해진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의 마음도 단정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외출준비를 하고 신발장 문을 연다.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 아닐까 싶다. 이것저것 신어보고 특히 굽의 높이를 눈여겨본다. 그날의 옷차림에 따라 운동화를 신을 것인지, 몇 센티의 구두를 신을 것인지 색상은 어떤 색이 어울릴 것인지 찬찬히 훑어본다. 신발장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신발들. 한여름을 지날라치면 한두 개의 샌들도 기본이다. 정장 차림에는 굽이 높고 뾰족한 구두가 어울린다. 운동화나 단화 차림은 왠지 몸가짐과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 같아 웬만해선 피했다.

한때 칠 센티미터 이하의 굽은 신발로 치지 않았다. 한 번 위 공기의 맛을 알아버린 높이는 내려올 줄 몰랐다. 발도 주인의 취향에 맞게 잘 견뎌 주었다. 굽이 낮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굽 낮은 신발을 신고 나간 날은 걸음걸이가 이상한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뾰족구두는 손이 많이 간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굽갈이해 주어야 하고,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서 굽이 벗겨지면 반드시 수선을 맡겨야 한다.

어느 날, 오랜만에 공항에 마중을 나가게 되었다. 한껏 멋을 부려보기로 했다. 블링블링한 파란색 시스루 블라우스, 목둘레에 큐빅이 박힌 화사한 옷이다. 핑크 바탕에 큼직한 꽃밭을 이룬 스커트를 입고, 그에 걸맞은 샌들을 찾았다. 은색 가느다란 두 줄의 끈으로 되어 있는 샌들을 꺼내 신고 한 바퀴 돌아보았다. 완벽하다.

공항주차장에다 차를 세워 두고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오가는 인파를 피하느라 그만 발이 삐꺽하면서 미끄러져 끈이 떨어지고 말았다. 황급히 신발을 들고 맨발로 걸었다. 한쪽 발은 신발을 신은 채로 절룩거리면서…. 건널목을 건넌 후에는 체념한 체,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망신살이 뻗쳤다.

수선집이 있다는 공항 2층엘 올라갔지만,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주인장은 자리를 비웠다. 한참을 기다리다 터덕터덕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지만, 궁여지책으로 편의점에서 삼선슬리퍼를 마련하고 질질 끌고 다닌 날의 기억은 지금도 떠올리면 아찔하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노래가 울려 퍼지면 빨간 구두 아가씨의 걸음걸이가 그림이 그려진다. 나도 ‘똑똑똑’ 소리를 내볼까 마음을 먹으며 신발장 하이힐의 존재를 소환해 냈다가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스러져 버린다.

지인 중에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까지 했던 팔순의 어르신이 뾰족구두를 신고 다녔다. 보통의 어르신들과 달리 허리를 꼿꼿이 세워 걸었다.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두 다리를 살짝 오른쪽으로 비켜 모은 모양이 좋아 보였다. 나도 저 나이가 되어도 그분처럼 살아야지 했던 다짐은 이제 물 건너간 것이 아닌가.

칠 센티미터 이하의 구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가 발에 익숙한 단화만 주야장천 끌고 다닌다. 어쩌다 하이힐을 신는 날에는 차에 편안한 신발을 준비해 놓는 준비성도 생겼다.

이제 ‘또각또각’의 환상에서 벗어나 신발에서 내려올 때가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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