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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언어 다음으로 인류가 발견한 최대 작품이 '불'이라고 했다. 불은 인류 수명을 연장했으며 더 추운 곳까지 거주지를 넓혀줬다. 먹거리를 불로 요리하면 살균도 되고 더 영양가 있는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이렇듯 '가열'은 인류가 고대부터 수행한 익숙한 활동 중 하나이면서 철을 제조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삶의 큰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특히 현대 제조 산업에서 가열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새로운 방식의 가열 기술 개발과 도입으로 혁신 제품 제조를 가능하게 해주기도 한다.
문제는 가열을 위해 화석연료를 연소시키거나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면서 많은 탄소가 배출된다는 점이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탄소 배출원 37%가 전기 및 열 생산 부분이고 2021년 기준 산업용 전기 사용량은 전체의 55%에 이른다.
2023년 4월에 발표된 '탄소중립 녹색성장 국가전략 및 제1차 국가 기본계획' 3대 정책 방향 중 하나는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한국형 탄소중립 기술 개발과 사업화를 추진해 저탄소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제조 산업 중심의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 구조 및 낮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갖고 있던 현실을 반영한 계획이었다.
우리나라에서 2015년부터 실시해오고 있는 탄소배출권 거래 제도는 지금까지 큰 실질적 부담이 없지만 2026년부터 점차 부담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로 유럽 탄소배출권 가격은 지난 3년 동안 5배나 상승했다.
◇외부 가열의 비효율성과 내부 가열의 효율성
제조 산업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가열 기술은 화석연료나 전기를 이용해 고온이 필요한 대상 주변 온도를 높여 전도, 대류, 복사를 통해 열에너지를 외부에서 전달해 주는 일명 '외부 가열' 방식이다. 외부 가열 방식은 주변 물질들과 열원 자체를 고온으로 만들어줘야 하므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매우 크다. 또 열에너지 전달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보통 수시간에서 수일에 걸친 장시간 온도 유지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1㎜ 두께 유리 기판 위 100㎚(1만분의 1㎜) 두께 박막 전극을 가열해야 할 경우 외부 가열 방식은 가열해야 할 물질이 꼭 필요로 하는 양보다 적어도 1만배 넘는 열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외부 가열 방식에 사용되는 에너지 대부분이 불필요한 낭비일 수 있고 이는 상당한 양의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 가열 방식을 혁신하면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가열하고자 하는 재료 자체에 열을 발생시키는 '내부 가열'의 경우 주변 물질들을 제외한 가열 대상만을 타기팅(Targeting)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최소한의 에너지로 더 빠르게 가열할 수 있다. 게다가 가열 대상 주변 다른 부분은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어 외부 가열 방식에서는 불가능했던 고온 가열도 가능하다.
우리나라 산업의 주력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산업에서는 광 에너지를 이용한 내부 가열 방식 기술을 활발히 도입해 성공적인 혁신을 끌어내고 있다. 예시로 고출력 엑시머 레이저로 유리 기판 위 비정질 실리콘 박막만 순간적으로 고온 가열해 결정화된 실리콘 반도체를 만들어 고성능 디스플레이를 제조하고 있다.
선폭 3㎚ 이하 초미세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게 해준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에는 집중된 고출력 레이저로 작은 금속 액체 방울을 초고온으로 가열해 EUV를 발생시키는 기술이 사용된다. 다만 고출력 레이저는 전기 에너지에서 광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효율이 10% 이하로 아주 낮은 문제가 있다. 내부 가열 방식이지만 90% 이상 에너지가 버려지기 때문에 탄소중립 측면에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력 공급장치 등의 규모가 너무 크고 전체 시스템 가격이 매우 높아서 더 많은 제조 산업에 보급되는데 한계가 있다.
◇더 효율적인 비접촉 내부가열 기술 '마이크로웨이브 유도가열'
내부 가열 방식으로 마이크로웨이브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은 전기에너지를 열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약 60%의 높은 효율성을 보유하고 있다. 기존 마이크로웨이브 가열 기술의 경우 가정에서는 전자레인지로, 산업에서는 해동 건조 기술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마이크로웨이브 가열 기술도 물과 같이 극성 분자를 갖는 일부 유전체만 가열할 수 있는 유전가열 원리로서 금속과 같은 전도성 소재는 잘 가열되지 않고 쉽게 방전을 일으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에 최근 한국전기연구원(KERI)에서는 마이크로웨이브 '유도' 가열 메커니즘을 응용해 얇은 금속과 같은 전도성 소재를 내부 가열할 수 있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다양한 제조공정에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마이크로웨이브 유도가열 기술 원리는 마이크로웨이브 자기장을 이용해 얇은 전도성 소재에 유도된 전류에 의해 저항 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가정에서 많이 사용하는 인덕션 조리 기구의 고주파 유도가열과 원리는 같다. 다만 사용하는 전자기파 주파수가 1만배 정도 높기 때문에 두꺼운 금속 소재보다는 반도체, 이차전지 등 전기·전자 소자에 필요한 매우 얇은 전도성 소재를 가열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마이크로웨이브 유도가열 기술을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소성 공정에 적용하는 연구 결과 기존 외부 가열 방식으로 최고 온도 1200℃를 유지하여 24시간이 필요한 과정을 단 1분 만에 수행하면서도 성능은 크게 향상하는 것을 확인했다. 나아가 내부 가열 방식으로 크기가 작은 MLCC만 선택적으로 고온 가열하기 때문에 기존 방식의 단 2.5% 전기에너지만으로 공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사례로서 차세대 이차전지 중 하나인 나트륨 이온전지 하드카본 음극재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전자신문 2024년 10월 8일자 보도). 이 음극재는 1200℃ 고온에서 수 시간의 에너지 소모적인 공정이 필요해 경제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마이크로웨이브 유도 가열로 고분자 원료만 선택 가열해 30초 만에 하드카본을 제조하는 효율적인 새로운 공정 기술로 개발할 수 있었다. 현재 국내 관련 대기업과 협력해 기술 상용화를 위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제조 산업 전반에 미칠 기대 효과 커
마이크로웨이브 유도가열 기술이 이처럼 전기·전자 제조 산업의 새로운 내부 가열 기술로 상용화되는 데 성공한다면 마이크로웨이브가 갖는 효율성 덕분에 제조 산업에 광범위한 혁신을 일으키면서도 동시에 탄소중립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해외 기술 선진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고출력 레이저 기술과 달리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기반 기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 새로운 가열 기술은 아직 세계적으로 덜 알려진 탓에 이슈화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머지않은 장래에 세상을 선도할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연구 개발자들이 이런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속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한국전기연구원에서는 마이크로웨이브 유도가열 기술을 'KERI 큰 기술'로 선정해 장기 지속 연구 주제로서 지원하고 있다.
이에 더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 그리고 가열 기술과 그 대상 분야를 확장하는 연구개발 투자도 필요한 실정이다. 국내 기업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 예상되는 이 기술의 연구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해 관련 기술 발전을 촉진하고 전문 인력 양성도 활성화해 세계를 선도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남균 한국전기연구원장
〈필자〉김남균 원장은 1984년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한국전기연구원 입사 이후 전기차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이는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국산화 개발에 성공하며 기술이전까지 마쳤다. 주요 보직으로 전력반도체연구센터장, HVDC연구본부장, 연구부원장, 원장 직무대행을 차례로 역임하며 원내 연구역량 강화를 이끌었다. 대외적으로는 SiC 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부회장, 한국세라믹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수상 내역으로는 과학기술훈장 도약장(2018년),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자랑스러운 전기전자재료인상 수상(2022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