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N <태풍상사>의 장르는 관광 상품이다. 1997년 외환 위기, 통칭 IMF 사태로 폐업 위기에 몰린 아버지의 회사 태풍상사를 재건하려는 강태풍(이준호)의 도전을 담은 이 드라마에서 시대적 배경은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공들여 묘사된다. 어떻게 아닐 수 있겠나. IMF의 자금지원 협상 최종 타결 소식에 대해 MBC <뉴스데스크> 앵커는 “오늘은 가히 국치일이라고 할 만”하다고 침통하게 전한 바 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이 무너졌고, 일상을 그럭저럭 부여잡은 이들도 어제까지의 믿음이 매번 새롭게 무너지는 걸 경험하던 나날이었다. 경제 위기의 충격파와 함께 태풍의 아버지 강진영(성동일)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태풍상사의 직원들은 제 살 길을 찾아 회사를 떠나며, 태풍과 어머니 정정미(김지영)는 오밤중에 강남 아파트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된다. 개인의 실수나 잘못이나 낭비와는 상관없는, 이 불가항력적 불행은 드라마에서 계약서 내용을 해석하며 주장하듯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정작 <태풍상사>는 이러한 천재지변을 맞은 한국의 시대상을 재난물의 정서가 아닌 같은 방송사의 인기 프랜차이즈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은 레트로 스타일로 그려낸다. 간판의 폰트 하나하나 신경 쓴 90년대 을지로 풍경과 당대 인기 가요가 흘러나오는 압구정 클럽, 3.5인치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가 달린 컴퓨터 등의 소품으로 구현된 서울은 풍요의 몰락보다는 익숙하지만 이젠 부재하는 아기자기한 향수의 풍경에 더 가깝다. 시대극으로서 <태풍상사>는 공들인 미술과 다양한 장치로 시청자를 과거로 끌고 오는데 성공하지만, 그 과거는 일종의 테마파크다.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험은 희소한 관광 자원으로 가공되어 제공된다. 시청자를 우리 자신의 과거에 대한 관광객으로 만들며.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가 흘러나오는 드라마 오프닝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고증보다는 당시의 촌스러움을 좀 더 코믹하게 연출한 이 오프닝에서 방송기자는 견실한 중소기업 태풍상사를 소개하며 직원들을 인터뷰한다. 이 과도하게 활기찬 첫 장면의 일차적 목표는 물론 IMF 개입 소식을 전하는 1화 마지막 순간과 대비되는 것이다. 낙관의 붕괴. 정말 그랬다. ‘나는 문제없어’는 추억의 가요기도 하지만, 외환 위기를 맞기 이전 90년대 중반 특유의 낙관이 가득한 가사였다. 이 대비엔 분명 시대적 비애가 있다. 하지만 이 오프닝에서의 희망에 들뜬 태풍상사는 완전히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결국 새 대표가 된 태풍이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 재건할 근미래의 풍경이기도 하다. 당장 방영된 4회까지만도 태풍은 아버지의 죽음과 미수금에 대한 연대 보증, 폐업 압박, 집 경매 등 갖은 시련을 겪지만 그 사이사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경리 오미선(김민하)을 비롯한 태풍상사 직원들의 조력으로 발주처 대방섬유의 부도를 눈치채 물건을 지키고, 불합리한 계약서로 뒤통수를 친 표상선 대표 표박호(김상호)에게 역공을 가하기도 한다. 한 회에 한 번 이상 외환 위기발 불행이 찾아오지만, 역시 한 번씩 쾌감 가득한 비즈니스 드라마로서의 활극이 펼쳐진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태풍과 미선에겐 위기가 반복되겠지만 매 순간 그들은 이겨낼 것이고 아마 퇴직한 태풍상사 멤버들도 하나둘 돌아올 것이며 ‘나는 문제없어’는 다시 울려 퍼질 것이다. 레트로 드라마로서 <태풍상사>는 IMF 사태 이전 호황의 기억과 IMF 사태를 극복한 역사적 결과론을 중첩해 위기까지도 낭만화한 가상의 과거를 만든다.

첫 화 제목인 ‘폭풍의 계절’부터 최근 화 ‘바람은 불어도’까지 각 에피소드 제목이 90년대 드라마 제목인 것에서 알 수 있듯 <태풍상사>는 스스로 레트로 테마파크임을 숨길 생각이 별로 없다. 가령 2화 ‘아스팔트 사나이’는 1995년 SBS 드라마 제목인 동시에 해당 에피소드에서 실제로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동분서주하는 태풍을 묘사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90년대의 유산을 코드화해 적절히 이어 붙이는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감각은 상업 레트로 드라마로서 <태풍상사>의 확실한 강점이다. 하지만 이처럼 90년대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장치로서의 드라마 제목들은 정작 각 작품이 만들어지고 방영되었던 실제 역사적 사회적 맥락으로부터는 철저히 분리된다. 한국 자동차 업계를 그린 <아스팔트 사나이>는 IMF 사태 이전 전형적인 한국 대기업의 기술 주권과 세계 시장 진출의 낙관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단 2년 뒤 벌어진 외환 위기와 함께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자동차 회사들이 매각되고 가혹한 구조조정을 겪은 것을 떠올리면 가장 어울리지 않는 드라마를 고른 셈이지만, 상관없다. 필요한 건 그저 테마파크의 분위기를 살릴 장식물이므로. 3화 제목 ‘서울의 달’은 어떠한가. 동명의 94년도 MBC 드라마만큼 고속 성장과 이촌향도에 따른 당대 서울의 윤리적 아노미를 잘 그려낸 작품이 없다. 물론 <태풍상사>는 그런 시대 맥락엔 관심이 없다. 그저 미선이 사는 달동네의 풍경을 조금 척박하지만 정겨운 향수의 공간으로 구성해 테마파크 한 켠에 안치하기 위해 그럴싸한 90년대풍 제목이 사용될 뿐이다. 이 테마파크 안에서 태풍은 벨이 울리는 팩스의 수화기를 집어 들거나, 동년배 직원인 배송중(이상진)과 이제는 추억이 된 한컴타자 산성비 게임 대결을 하며 역사적 맥락과 분리되어 사물화된 90년대를 관광객이 된 시청자 앞에 전시한다.
이것은 단순히 IMF 사태라는 시대적 배경을 오락적으로 소비해도 되느냐는 문제는 아니다. 외환 위기의 충격은 컸지만 모두가 식음을 전폐했던 것은 아니며 그 시절에도 눈물만큼 웃음도 사랑도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위기를 버텨냈는지, 그리고 그 실패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겠’다는 드라마 기획의도 자체는 결코 허황되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희망의 서사가 정말 그 시대를 견뎌낸 보통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다수를, 좀 더 정확히는 낙오한 이들의 역사를 배제하는 방식의 체리피킹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공식 포스터에서 태풍은 선언한다. “무너진 건 시대지 나는 아니야.” 실제 당시에도 꺾이지 않은 이들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외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 극복의 주체는 태풍처럼 자기 앞의 가시적 고난을 이겨내는 인물만이 아니다. IMF의 혹독한 조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계층 사다리에서 탈락하고, 평범한 일상을 잃었다. 그들은 명백한 시대의 피해자지만 패배자는 아니다. 그들이 단순히 낙오한 게 아니라 그들의 처절한 고통 분담을 통해 한국이 가까스로 회생했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IMF 사태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면, 그 희망이 무너진 시대에 깔린 수많은 이들의 절망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생존자가 운이 좋고 낙오한 이들이 불운했던 게 아니라, 낙오한 이들의 불운으로 생존자의 행운이 성립한 것이다. IMF의 부채는 갚았지만 더 큰 고통을 분담한 이들에 대한 부채는 여전히 갚지 못한 미완의 역사가 위기를 딛고 일어서는 선형적 승리 서사로 대체될 때, 오락물로서의 레트로는 안일한 역사 재현에 그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왜곡한다.

주인공 태풍이 부모의 재력으로 명품 셔츠를 입고 밤마다 클럽을 다니던 압구정 도련님인 건 우연이 아니다. 위기 극복의 주체는 누구인가. 승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무엇보다, 기억의 주체는 누구인가. 당장의 국가적 위기는 견뎌냈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중산층에 올라갈 수 있다는 계층 이동의 상상계는 무너졌고, 생존한 상위 중산층은 공고한 지위 세습의 성벽을 쌓았다. IMF 사태를 기억하는 방식은 현재의 모순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IMF 위기 극복의 서사가 애초에 상위 중산층이었던 태풍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오디세이로서의 여정으로 그려질 때, 이 고난은 오디세이에게 그러했듯 그가 되찾을 지위에 대한 정당성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이 위기는 역사의 경로에서 잠시 경험한 선로 이탈일뿐, 사필귀정 본래의 방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IMF 사태는 고도성장의 모순이 폭발해 여전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비가역적인 상처가 아니라, 현재의 상위 중산층이 극복해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는 과거의 모험담이 된다. 그들이 그렇게 과거를 전유해 잘난 척을 하고 싶다면 어쩔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관광 상품으로 시청자를 수동적인 관광객의 자리에 놓겠다면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경제 주권만큼 뺏겨선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기억의 권리이므로.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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