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서 만난 선생님들 / My Teachers
대학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각양각색이었다. 가장 관심이 끌린 분은 필수과목인 중국어문학 담당의 여우서우(游寿) 교수였는데, 언어-문학 교사보다 문헌학자라 할 분이었다. 그분의 1학년 강의는 전혀 틀에 매이지 않은 것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르치고, 소화해 내는 것은 학생들 몫이었다. 다행한 일은 그분이 고전문학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말씀 내용이 내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기는 해도 시경과 한대(漢代)의 부(赋) 중에서 작품을 뽑아내는 자세에 나타나는 애정이 내게 자극을 주어 열심히 따라가게 되었다.
내 열성이 드러나 보였기 때문에 그분도 내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분이 고르는 작품들을 이미 잘 알고 있던 다른 학생들과 달리 나는 따라가는 데 열성이 필요했다. 그분은 내 외국 배경도 흥미로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샤먼(廈門)대학에서 가르친 일이 있어서 그 대학 창설자 탄카키(陳嘉庚) 선생을 존경하는 데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탄 선생은 영국령 말라야의 사업가였다.
[역주: 동남아 화교의 조국에 대한 공헌은 신해혁명을 계기로 크게 늘어나 종래의 경제적 공헌을 넘어 여러 분야로 확장되었는데, 문화적 공헌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샤먼대학 설립이었다. 싱가포르의 사업가 탄카키가 1921년 설립한 샤먼대학은 1937년 국가에 헌납되어 국립대학이 되었는데, 그 기간에 총장을 맡은 싱가포르의 의사이자 고전학자 림분컹(Lim Boon Keng 林文慶)의 역할도 높이 평가된다.]
여우 교수가 좋아한 또 한 학생은 진짜 고전 시문을 지을 줄 알고 게다가 서예에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첸서즈(錢璱之)는 명문가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온갖 재간을 익힌 수재였다. 우리 반 학생 중에 여우 교수가 얼마나 훌륭한 학자인지 알아보고 그분 학문을 존경한 것은 첸 하나뿐이었을 것 같다. 여우 교수는 작달막한 키에 미인도 아니고 차림새가 단정할 때가 별로 없었다. 푸저우(福州) 방언이 심해서 강의를 알아듣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그분의 말씀이 보통 교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 문헌 연구의 성과라는 사실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어떻게 자기 판단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판단이 종래의 해석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분 설명을 듣는 것은 우리의 행운이었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한 일인데, 지내고 보니 성실한 학자의 자세를 내가 처음으로 실감한 모델이었다.
그 강의는 고대부터 명-청대까지 중국문학을 소개하는 목적이었으나 여우 교수는 언어의 기원과 시문학의 발달 과정에만 집중했다. 내가 〈삼국지〉나 〈수호전〉 같은 고전소설을 읽어본 사실을 표낼 기회를 주지 않았고, 당대(唐代) 시문을 별로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당대 이후 천년 간의 중국문학에 대한 내 지식은 오랫동안 얄팍하고 흐릿한 수준에 머무르게 되었다.
송대(宋代)의 사(詞)까지 얼마간 소개받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당신 외조부인 첸팅줘(陳廷焯)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그 장르에 관심이 적어서 당신 외조부님이 어떤 점에서 평가받는 것인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송대에 뛰어난 사 작품들이 나온 이유를 여우 교수가 설명할 때, 우리 아버지는 첸팅줘의 백우재사화(白雨齋詞話)가 그 장르에 공헌한 바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말했다.
여우 교수는 그 작품도 잘 알고 있었고, 나는 내가 문간에서 기웃거리는 화교 따위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조상 덕을 확실히 본 첫 경험이었고, 얼마 남지 않은 그 강의 동안 어깨를 펴고 지냈다. 말라야에 돌아가 계시던 아버지에게 편지로 여우 교수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잘 해낼 것을 믿는다며 그분에게 많이 배우라고 격려해 주셨다.
여우 교수를 다시 보지 못하다가 1993년에 소식에 접했다. 내가 홍콩대학에 있을 때 그분 제자 하나가 찾아와 안부 말씀과 함께 그분의 시 복사한 것 약간을 전해주었다. 알고 보니 수십 년간 북쪽 끝 헤이룽장성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 갑골문 연구를 계속하면서 또한 장기간 중국 황제들을 위협해 온 그 지역 주민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 전문가가 되었다고 했다. 문화혁명 때 곡절은 듣지 못했으나 1980년 이후로는 존경받는 학자의 위치에 돌아와 있었다.
그분 소식이 반가워서 내 책 하나를 보내드리고 다시 뵐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까지 품었다. 그러나 몇 달 후 88세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이 1947년 중앙대학에서 1학년 중국문학 강의를 맡게 된 경위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분은 원래 뛰어난 문헌학 연구자로 중앙연구원 연구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때 역사어언연구소 푸스녠(傅斯年) 소장과 오해가 생겼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굽히지 않다가 퇴출되고 말았다. 쓰촨성의 조그만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947년 중앙대학에 들어와 난징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푸스녠은 그 세대 역사학계의 지도자였다. 그는 국민당정부를 따라 타이완에 가서 국립타이완대학 총장을 지냈다. 홍콩 있을 때 중앙연구원과 교류가 있어서 그곳 원로 학자들과 문헌학 분야의 성과에 관해 알게 되었다. 여우 교수가 연구원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동료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가 학문적 업적을 널리 알리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됐든 그분은 문학 발달 과정에서 고대 언어의 힘에 내 눈을 열어준 선생님이었고 여러 해가 지난 후 싱가포르의 말라야대학에서 가르칠 때 선진(先秦)시대의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를 시켜준 분이기도 하다.
중앙대학에서의 첫 몇 달 동안에 신중국을 향한 내 눈이 열렸다. 매일 보고 읽는 것이 부모님이 그려주시던 이상화된 모습과 달랐다.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짧은 시간 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시각을 조금만 바꿔도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1930년 이전 그분들 젊은 시절의 중국을 그리워하며 중일전쟁에서 회복되면 과거가 되돌아올 것을 희망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중국인으로 확인하고 중국에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부모님 견해를 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내가 들어간 중앙대학은 아버지의 모교일 뿐 아니라 중국 최고의 학교였다.
다녀 보니 역시 최고의 학교였고 거기 들어간 것이 고마운 일로 여겨졌다. 조심스럽게 선발된 우리 학생들은 국가의 소중한 인적 자원이었다. 기숙사도 공짜였고 수업료도 없었다. 하복과 동복, 두 벌의 장포(長袍)를 지급받았다. 길고 참혹한 전쟁의 직후라서 형편이 안 좋은데도 학교 당국은 학업 여건을 갖춰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뛰어난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했고 대학이 졸업생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확인해주었다.
우리 선생님들은 내전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인플레로 인한 경제 약화가 모든 국민의 고통을 가져오고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난징 사람들은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으로 힘든 여건에 조용히 적응해 나갔지만, 선생님들에게 생계를 위해 부업이 필요했던 사실을 보면 괜찮은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강의 후에 학생들과 만나주는 선생님들도 있었으나 긴 시간을 내주지는 못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맞아준 훈육주임 선생님이 생각난다. 훈육주임은 학생들 돌봐주는 직책이다. 중국 학교 출신이 아닌 내게는 생소한 직책이었는데, 아버지가 시찰하던 페락 주의 중국인 학교에는 학생들의 자세와 품행을 책임지는 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앙대학의 훈육주임 사쉬에쥔(沙學浚)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한 명성 높은 학자로, 중국 지리에 관한 중요한 책 몇 권의 저자였다. 청결과 책임감에 예민한 사 교수는 학생들 품행의 기준을 세워주었다. 모든 신입생의 필수과목 “삼민주의”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국부 쑨원의 1925년 타계 전 일련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을 기반으로 한 과목이었다.
사 교수가 우리와 같은 타이저우 출신이고 아버지의 몇 해 후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장학금으로 독일에 가 베를린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분이다. 1949년 국민당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가서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후에는 홍콩과 싱가포르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964년 그분이 싱가포르의 남양(南洋)대학에 와 있을 때 아버지가 만날 자리를 만들려 하신 일이 있다. 당시 쿠알라룸푸르에 있던 나는 그분을 만나지 못했지만, 학생들이 시간을 잘 쓰도록 애쓴 진지한 학자로서 그분 모습을 기억한다.
학교에 들어가 뜻밖의 일 하나는 상급생 모두가 쓰촨 출신이거나 적어도 약간의 쓰촨 억양을 쓰는 반면 신입생 대부분은 장강 하류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동급생 중에는 쟝수나 저쟝의 우(吳) 방언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 “국립” 대학의 이름에 맞지 않는 편향성이었다. 먼 지방 학생들이 난징의 대학에 지원할 엄두를 내기 힘들던 전쟁 직후의 상황 때문이었다는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응시자 대다수가 장강 하류 지역 출신이었고, 학생을 적게 뽑은 데는 “지방”대학의 성격이 너무 강해질 것을 꺼린 이유도 있었다고 했다.
해외에서 살다가 온 내게는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 틈에서 지낸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부모님의 말씨만이 아니라 이포에서 듣던 학까어, 광둥어, 호끼엔어와도 다른 온갖 방언이 있었다. 선생님들 말씨 차이가 더 심해서 몇 분은 말씀을 듣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전체적으로는 여러 말씨에 내 귀를 웬만큼 맞출 수 있었고, 내 “중국 입문”의 요긴한 과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난징의 캠퍼스에서 “쓰촨 표준어”가 널리 쓰이는 상황에서 대학이 1937년 이 도시에서 쫓겨난 후 10년간 고난의 행로를 읽을 수 있었다. 선생님-선배님들이 겪은 상황을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신입생 대부분은 왕징웨이 괴뢰정권 치하 지역 출신이었다. 그들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전쟁 중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싫어했다. 집단망각증을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여기는 집단 속에서 지내는 내 첫 경험이었다. 전쟁 시기를 잊으려 드는 사람들이 반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비난받던 이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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