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의 저주 아르헨, 밀레이 '전기톱 개혁'이 살렸다

2025-05-10

아르헨 살린 밀레이 ‘전기톱 개혁’

2023년 가을 아르헨티나 기업인들이 대선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와 간담회를 했다. 대화 도중 밀레이가 옆의 대기업 오너에게 불쑥 물었다. “탈세하고 있죠

?

” 당황한 기업인은 아니라고 답했다. 밀레이는 정말이냐고 재차 묻다 이렇게 말했다. “탈세하는 사람이 영웅입니다.”

동석했던 가전업체 피바디의 오너최도선 회장의 목격담은 밀레이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선 그는 정부를 악으로, 세금을 정부의 도둑질쯤으로 본다. 스스로 무정부를 지향하는 아나코-캐피탈리스트라고 한다.

무정부 성향을 지닌 국가원수. 이 역설이야말로 아르헨티나가 좌파 포퓰리즘과 결별하게 된 출발점이다.

그의 논리는 명확하다. 선심 정책 탓에 재정이 거덜나고, 하이퍼 인플레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를 잡으려면 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퍼주기 복지, 방만 재정, 철밥통 공무원, 밑도 끝도 없는 보조금

뭐든지 전기톱으로 썰어내겠다고 공약했다. 과거 정부가 개혁 시늉을 낼 때 쓰던 소품이 가위였던 데 비해 굉음을 내는 전기톱은 대중에게 그의 개혁 의지를 각인시켰다.

암달러 가격, 공식환율보다 되레 낮아져

약속대로 그는 보조금과 연금 등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정부조직도 확 줄였다. 18개 부처 이름을 적은 테이프를 보드에 붙여놓고 “꺼져(¡Afuera!)”라고 소리치며 하나하나 잡아떼는 퍼포먼스는 유명하다. 취임 후 15개월 간 전체 공무원의 8.4%인 4만2000여 명을 내보냈다. 이래저래 재정지출을 단번에 30% 줄였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국채를 인수하던 것도 끊었다.

1년여 만에 거시지표들이 모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인플레는 잡히고, 성장률은 오르고, 통화가치는 높아지고, 빈곤율은 떨어지고,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사람으로 치면 독한 몸만들기로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이 두루 개선된 셈이다.

최대 성과는 역시 물가 안정이다. 보통 물가가 1년에 두 자리 수로 뛰면 나라가 흔들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선 한 달에 두 자리 수도 예사였다. 그러던 게 이젠 월 1%대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1976년 이민 와 물류사업을 하며 역대 정권을 겪어본 LK글로벌 강태민 대표는 “인플레를 잡은 건 과거 아르헨티나를 되돌아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성장률은 지난해 하반기 플러스로 돌아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4년 성장률을 -2.8%로 예상했으나 가속이 붙어 -1.7%로 높아졌다. 올해 전망치는 5.5%로 급반등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칼럼니스트 릴리아나 프랑코는 “IMF 전망에 대해 경제학자들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며 “예상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다는 건 큰 변화다. 정부통계국(INDEC)에 따르면 2024년 민간부문 정규 근로자는 660만 명이다. 2013년에 비해 불과 20만 명 증가한 데 그쳤다. 아르헨티나의 고용탄성치가 0.6이므로 밀레이의 남은 임기 3년간 같은 수준으로 죽 성장한다면 고용은 매년 3.3%씩 모두 10%쯤, 약 67만 명 증가하게 된다.

잠시 높아졌던 빈곤율은 뚝 떨어졌다. 초기 공공부문 실업자들이 쏟아지자 야당은 나라가 더 가난해졌다고 거품을 물었다. 소득이 기본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구의 비중으로 측정하는 빈곤율은 지난해 중반 52.9%로 치솟았다. 그 뒤 물가 안정과 고용 회복으로 최근 38.1%로 낮아졌다. 자유지상주의 개혁이 빈곤층을 양산한다는 비난은 힘을 잃었다.

외환시장의 안정은 길거리에서 실감할 수 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리다 거리엔 암달러상들이 “캄비오(환전)”를 외치며 늘어서 있지만, 이들과 흥정하는 이는 보기 어렵다. ‘블루 달러’라 불리는 암달러 환율과 공식 환율의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4월 30일 이후엔 암달러 가격이 공식환율보다 되레 낮아졌다. 밀레이 취임 당시 25% 정도, 그 전엔 배에 달했던 게 말이다. 지난 6일 공식 환율은 달러당 1215페소, 암달러 환율은 1190페소다. 암달러상은 이제 사양업종이 됐다.

본격적인 규제철폐로 일상생활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주거환경이다. 월세 눌러놓고, 세입자 못 내보내게 하던 임대규제를 밀레이 정부가 싹 없앴다. 세입자 보호는커녕, 임대물건을 줄이고 임대료를 폭등시켜 원성이 자자한 규제였다. 1년도 채 안 돼 임대물건은 170% 늘고, 임대료는 40% 떨어졌다. 지난해 미국 대선 때 카말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비슷한 임대 규제를 공약하자,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를 비판하며 모범사례로 든 게 밀레이의 정책이었다.

시장이 살아나자 기업들은 움직이기 편해졌다.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은 “거시경제가 정돈되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고, 개방에 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통관, 인증, 대금 지급 절차는 몰라보리 만큼 간소화됐다. 과거엔 수입 승인을 받으려면 중앙은행에 서류를 제출하고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지금은 웬만하면 48시간 안에 허가가 난다.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은 “무역대금 지급 규정이 통관 후 180일에서 지난해 30일로 단축돼 기업들이 크게 반긴다. 투자 문의도 몰라보게 늘었다”고 전했다. 또 5월엔 2019년부터 묶어뒀던 외국기업의 과실송금 제한도 풀었다.

개혁 성과를 유보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충격요법에 따른 반짝효과라는 논리다. 한국의 산업은행 격인 방코나시옹의 에두아르도 헤커 전 행장은 ‘표면적’이라고 평가한다. “국제 경쟁력은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통해 확보되는데, 아직 그런 변화가 시작되지도 않았고, 경제를 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또 법인세보다 관세를 덜커덕 먼저 내린 탓에 수입품이 밀려들자 내수기업들은 아우성이다. 개혁의 순서가 뒤엉켰다는 불만이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산업연합회(UIA) 마르틴 라팔리니 회장은 “자유롭게 경쟁하라면서 국내 기업들만 모래 주머니를 차고 뛰게 한다”고 말했다.

페소 강세의 그늘도 짙다. 수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품이 밀려들고 있다. 목축국가 아르헨티나에 곧 쇠고기가 수입될 판이다. 해외소비는 성큼성큼 늘어 지난 1월 해외 카드 사용액이 7년 만에 최고치(6억4500만 달러)를 찍었다. 그러니 경상수지 적자는 자꾸 불어 가뜩이나 모자라는 외환보유액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3월 경상수지 적자는 16억7400만 달러로 밀레이 취임 후 최대폭이었다.

그런데도 페소가 강세인 건 정부의 개입과 IMF의 지원 의지가 확실하고, 시장도 이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유지상주의자 밀레이도 외환시장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다. 이게 과도기적 역설인지, 곧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인지,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알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감대는 확실해 보인다. 실패한 포퓰리즘 경제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라팔리니 회장은 기업인들을 ‘생존자’로 부른다. 격변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이젠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혁신과 경쟁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한다.

“밀레이에 익숙해져 과거로 못 돌아갈 것”

서민층에 속하는 택시 기사들은 압도적으로 밀레이 편이다. 취재팀이 33회에 걸쳐 현지 택시와 우버를 이용하면서 설문한 결과 32명이 지지를 표명했다. 우버 드라이버 다니엘 에두아르도는 “이번에 바뀌지 않으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사 앤젤 프란스시코도 “많은 것이 바뀌고 있고, 사람들도 점점 희망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밀레이 퇴임 후에도 개혁조치들은 유지될까. 밀레이와 결이 다른 사람들도 지속가능성을 높게 본다. 페로니스트 정부에서 산업부 장관(2019~22)을 지냈던 마티아스 쿨파스는 “개혁의 일부는 지속가능하다. 특히 재정준칙과 원칙적인 통화관리는 앞으로도 오래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방향이 옳고, 성과가 확실한 데다, 많은 국민이 이에 적응했기에 개혁을 되돌릴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밀레이가 워낙 많이 바꿔놨고, 이젠 사람들이 그에 익숙해져 예전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부에노스아이레스=미주중앙일보 남윤호·김상진·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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