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만 가르치는 학교에서 ‘마음 건강’도 배우는 학교로

2024-09-25

자살률 1위 대한민국 탈출을 위한 혁신의 출발점

지난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었다. 한강 다리의 자살 방지 펜스를 높이고 신고·상담 전화를 늘리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사후약방문식 대처만으로는 15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할 수 없다. 통계가 이를 방증한다. 특히 심각한 건 2020년대 들면서 유독 청년·청소년 자살률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10~19세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20대 자살률은 2017년 인구 10만 명당 14.2명이었는데 2021년엔 22.5명으로 59%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30대 자살률은 20.6명에서 23.1명으로 늘었다. 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10.8명)의 2배를 훌쩍 넘는 수치다.

우울·자살 등 청소년 마음 건강 심각

학교 교육으로 회복 탄력성 높여야

‘사회정서 역량 교육’은 세계적 추세

부모들 인식 변해야 실질적 교육 돼

자살·중독·학교폭력·은둔형 외톨이등 청소년의 정신 건강 문제를 다루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등 의료계와 교육계 전문가 등을 중심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의 사후 대응이나 선별적·개별적 처방을 벗어나 모든 학생이 어릴 때부터 마음건강에 대한 보편적 교육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감정 조절과 스트레스 관리 능력을 키우고 심리적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이겨내는 회복 탄력성을 길러줘야 자존감 있는 학교·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 북미·유럽 등 선진국들은 이런 ‘사회 정서 역량’(social and emotional competencies)을 높이는 쪽으로 교육 목표의 과녁을 옮기고 있다. 우리 아이의 마음 건강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짜는 일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응급실 오는 자살 시도 절반이 청년”

젊은 세대의 자살률 증가가 우리만의 고민은 아니지만 한국은 그 증가율과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응급실에 실려 오는 자살 시도 환자의 절반이 청년” 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교육부와 질병관리청이 실시한 2022년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8.7%가 우울감을 경험했고 ▶자살을 생각한 비율은 14.3%로 나타났다. 같은 해 교육 관련 NGO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한 조사에서도 ▶학생 2명 중 1명은 학업이나 성적으로 인한 불안·우울을 경험했고 ▶4명 중 1명은 과도한 학업 경쟁 부담으로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에 대처하는 학교의 현실은 어떤가. 여지까지는 학생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통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고위험군)을 조기 발견·치료하는 것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둬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한계를 드러냈다. 우선,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학생과 부모가 상담·치유기관으로 보내지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들의 편견과 무지로, 또는 자녀의 문제가 외부로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거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현장 실무자들의 얘기다. 또 학생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3년 마다(초1·4, 중1,고1) 하도록 돼 있어 그 사이에 위기 징후가 발생할 경우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확보된 자료도 인권침해 논란을 이유로 바로 폐기되기 때문에, 상급 학년이나 상급학교로 갈 때 전달되지 못해 지속적 관리가 불가능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음건강 상담 등 도움이 필요한 학생의 10% 정도만 서비스를 받는다.

한 명의 위기 학생이 학교 전체 흔들어

강윤형 학교정신건강의학회장은 “교사들은 고위험군 학생을 조기 인지하고 지도할 실질적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다 학생·학부모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료 학생들은 학습권 침해로 고통받는다”며 “현재의 시스템에선 자살이나 자해·중독·학교폭력 같은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학생·교사·학교 모두 ‘멘붕’에 빠지며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이초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이 과정에서 교사가 심리적 압박을 느껴 극단적 선택을 하는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국립의료원 이소희 교수는 “학생의 위험·일탈 문제가 생길 때 그 책임이 교사 한 사람에게 전가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교사가 말 한마디 잘못해도 아동학대로 고발되거나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게 되니 교사의 효능감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요즘 학교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대개 학생을 전학시키기는 것으로 해결한다. 근원적 처방 없는 폭탄 돌리기식 임시방편 대처다. 그렇다 보니 위험-위기 학생은 점점 보호·치료의 사각지대인 ‘학교 밖 청소년’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 교수는 “자살 시도, 자해 같은 고위험군의 문제를 학교 안에서 껴안을 역량이 안돼 학교 밖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라며 “학교 전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사회정서 역량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학교에서 우울·섭식 장애 등 가르쳐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우울증을 느끼거나 불안 등 감정적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일생을 통해 배운 적이 없다. “사춘기니까”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라며 흘려보낸다. 그러나 미국·영국·일본 등에선 학교에서 자신의 정신 건강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가르치는 ‘사회 정서 교육’ 체계를 마련, 시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청소년 정신건강위원회(멘탈 헬스 코리아)’라는 청소년 단체가 지난해 발표한 ‘2023 청소년 정신건강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2022년 중·고교에서 의무적으로 정신건강 관련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 시행중이다. 우울증, 자살 충동 및 행동, 섭식 장애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학교 교육을 통해 학습하게 한다. 버지니아·애리조나 등 일부 주에선 학생이 원할 경우 ‘정신건강 휴식(mental health days)’을 갖도록 하고 있다. 스스로 정신 건강을 돌보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확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 연방 정부는 2011년 낮은 학업 성취도와 중도탈락, 자살, 폭력과 총기에 의한 사고 등 학교생활 부적응 문제 해결을 위해 ‘학업적·사회적·정서적 능력 함양을 위한 학습법’을 제정했다. 효과성이 검증된 ‘사회 정서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의 사회·정서적 욕구 개발과 학업 성취를 동시에 높이기 위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모든 정신과적 증상의 절반은 14세부터 시작된다”고 발표했듯이 청소년기 마음 교육이 인생행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중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2003년부터 정부 주도로 사회 정서 관련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영국도 감정 조절, 동기부여, 공감의 기술 등을 학교에서 가르친다.

1990년 중반 이래 ‘살아가는 능력’ 확보를 교육 목표로 표방한 일본은 ‘풍성한 마음과 건강한 신체’ 교육을 내용에 명시했다.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정규 교육과정인 ‘종합적 학습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생활방식이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수업을 받는다. 조현병·우울 장애 등 정신건강, 섭식장애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대처 등을 배울 수 있다.

내년부터 초·중·고 사회정서 교육 시행

한국도 공감·소통능력 등 사회정서 역량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월 교육부 내에 사회정서성장과를 신설, 사회 정서 역량 강화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민혜영 사회정서성장지원 과장은 “학생들이 성장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위기 정서, 스트레스 예방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해석·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초·중등학교에서 전면적으로 ‘사회정서 역량’ 교육을 시행하기로 했다”며 “현재 34개 초·중·고에서 1차 파일럿 학습이 진행 중인데 그 결과가 나오면 효용성 검증을 거쳐 내년부터는 전국의 1만1000개 학교에서 사회정서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관이 적지 않다. 어떤 커리큘럼을 담을 것인지, 교사들의 자존감을 높여 어떻게 성공적인 교육이 되도록 할 것인지도 숙제지만, 무엇보다 입시·성적을 중시하는 경쟁적 풍토에서 학생·학부모·학교가 사회정서교육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동참하도록 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습시간으로 전락, 형식적인 겉치레로 끝날 수 있다. 서완석 영남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식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조사하고 사례 연구를 통해 토론·공유하는 참여 유도 수업이 돼야 실질적 교육이 될 수 있다”며 “지도·교수 방법의 혁신과 함께 학부모들도 아이가 스스로 생각·판단하는 기회를 주는 게 좋은 교육이란 걸 깨닫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강윤형 회장도 “결국 공동체가 힘을 합쳐 건강한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는 관점에서 봐야 이 문제가 풀린다”며 “학교가 공부뿐 아니라 마음 건강을 학습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 학교는 공부 잘하고 능력 있는 아이뿐 아니라 장애와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다양성을 배우는 곳이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정서 교육=개인의 생각·감정·행동을 인지, 관리하며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조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지식·태도·기술을 갖춰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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