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에 어느 한 해인들 조용했을까만, 을사년을 보내는 마음이 스산하다. 어느 시대를 가릴 것 없이 한 시대를 살며 회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가 가장 격동기였으며, 그래서 스스로 불우하다고 여긴다. 역사든 인간사이든 지나고 보면 소설 같아, 이제야 웃으며 얘기하지 지나고 보면 참으로 누구에게나 한 편의 소설 같고, 한 시대의 장편 드라마 같다. 을사년이 유독 더 그러했다.
우리가 분노할 때 일본은 연구 매진
역사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 다뤄야
민중주의에 겁먹은 지식인은 침묵
진보주의 뒤따를 역사적 반동 우려

그런데 개인이든 국가이든, 우리의 을사년 역사에서 중요한 변인(變因)은 일본이었다. 그 비극의 시작을 보면 1905년 을사조약에서 비롯하면서 겪은 일본의 체험이 업장처럼 가슴을 누른다. 적어도 한·일 관계에서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dark history)에 대해 회오(悔悟)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진다. 한 제국이 멸망하면서 총 한 방 쏘지 못했고, 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협박 앞에 어쩔 줄 모르며 대신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당초 조선 합병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송병준(宋秉畯)이 1억 엔이면 나라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내심으로 3000만 엔을 약정하고 있었던 이토는 값을 낮춘 이완용(李完用)으로 배를 바꿔 탔다. 고종이 개명 군주라느니 국가의 멸망을 저지하려고 애썼다느니 하지만 허황한 이야기이다. 그가 진실로 망국을 걱정했다면 투쟁은커녕 이토가 보낸 30만 엔과 엄비에게 간 1만 엔과 황태자 부부에게 간 1만 엔짜리 다이이치깅코(第一銀行)의 수표를 받지 말았어야 한다.(‘일본외교문서’, 37/297쪽) 더욱이 그 황망 중에 일어난 배달 사고(?)를 빙자하여 전액을 받지 못했다고 푸념하는 것은 군주의 도리가 아니다. 매수금의 전달을 맡았던 도다 도노모(戶田賴毛)는 그리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전에도 없는 조어로써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부른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당시와 지금의 물가지수는 1엔=약 700원)
1965년 을사년에는 반일 시위로 한세월을 보냈다. 그해 체결된 한일협정을 두고 정권의 핵심이 아니고서는 모두 매국이라 비난하며 거리를 치달았다. 철없던 젊은 시절, 우리는 정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줄로 알고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 받은 10년 거치 3억 달러의 보상금과 차관 2억 달러가 근대화의 마중물이 된 것을 나쁘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그 돈이 없었더라면 포스코나 경부고속도로는 불가능했다. 거래는 조금 밑질 듯할 때 팔고 조금 비쌀 듯할 때 사는 것이다.
그 무렵에 한·일 관계가 좀 잠잠해지는가 싶으면 으레 독도와 동해 문제가 불거졌다. 아마 이 문제는 일본의 내정과 겹쳐 앞으로 천년을 더 갈 것이다. 그러므로 한·일 문제는 지모와 “공부” 그리고 긴 호흡과 “일정한 체념”이 필요하다. 내가 일본 학자들을 만나 독도 문제를 제기했더니, 그의 대답인즉, “한국 사람들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증명하는 일본의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도 독도가 일본 땅임을 증명하는 한국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참 무안했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한국 측이 비분강개하여 혈서를 쓰는 동안 저들의 역사학자들은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논리를 반박하는 증거로 민영환(閔泳煥) 전권대사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편으로 귀국 길에 독도를 지나면서 “저 마쓰시마(松島)는 일본 땅”이라고 기록해둔 사실(‘해천추범(海天秋帆)’ 1906년 10월 17일자)를 지적했다.
역사에는 가슴으로 산 사람이 머리로 산 사람을 이긴 사례가 드물다. 한국인으로서 누구인들 분노가 없으랴만, 분노는 이 문제의 정답이 아니며 먼저 격노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이다. 동쪽 바다의 이름이 동해라 하지만 일본이 보면 서해인데 자꾸 동해이니 조선해이니 하고 우기는 것은 합리적 타협안이 아니다. 이미 중국에서는 황해(黃海)라는 용어가 없어진 지 오래다. 중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남지나해·동지나해·중국해·황해라는 용어를 없애고 온통 중국해라고 부른다. 동해라는 논리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황해(서해)를 잃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왜 침묵하는가? 동해에서도 그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까? 이미 서해를 황해라고 부르니 동해를 청해(靑海)라고 부름으로써 한·일 간의 갈등을 푸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와 같은 논리가 토착 왜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거리를 달리는 자칭 애국주의자들의 공격에 얼마나 쉽고 위험하게 자신을 노출하는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 나서서 말해야 한다. 옥스퍼드대 역사학 교수인 젤딘(Theodore Zeldin, 1981)이 지적했듯이, 당대의 지식인들은 민중의 백내장을 제거하는 안과의사가 되어 그 시대가 잘못 가고 있는 편견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현실을 보면 민중주의에 겁먹은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고, 어른(원로)이 없는 사회에서, 언덕을 내려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불안을 느낀다. 이 폭주하는 진보주의 뒤에 닥칠 역사의 반동이 더 두렵다. 역사는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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