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의 강남 즐거운 변신
1994년, 영국 재벌인 아드리안 브릿지(61)는 도시의 풍경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포르투갈의 포르투를 끼고 흐르는 도루강의 남쪽 ‘빌라 노바 드 가이아’라는 마을에서였다. 지금은 ‘더 이트맨(The Yeatman)’ 호텔이 아드리안이 반한 광경을 이곳에 묵는 투숙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 도시와 사랑에 빠진 아드리안은 그때부터 자신만의 취향으로 도시를 꾸며가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번씩 꿈꾸는 내 집 꾸미기를 도시 단위에서 실행하는 거대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곳곳에 이 영국인의 취향이 묻어 있는 포르투의 복합문화지구이자 뉴타운 ‘와우(WOW)’가 탄생했다.
내 집 꾸미 듯 거대 도시재생 사업 실현
WOW는 강의 북쪽인 포르투 올드타운에서 도시의 랜드마크인 ‘동 루이스 1세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지역에 있다. 올드타운(강북)과 뉴타운(강남)을 잇는 2층 구조의 동 루이스 1세 하부 다리의 길이는 172m로 강을 건너는데 2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포르투의 일몰명소 모루정원을 지나 5분여 걷다보면 포트와인 저장창고를 리모델링한 거대한 와이너리에서 달콤한 포트와인 향이 코를 자극한다.
WOW가 있던 곳은 원래 문 닫은 포트와인 저장고였다. 강북 쪽 올드타운이 클레리구스 종탑, ‘해리 포터 서점’으로 불리는 렐루 서점 등 다양한 관광명소로 북적거릴 때 포르투의 강남은 2008년부터 쓸모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생산업체들이 포트와인 생산과 병입 과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와인 저장고들은 흉물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 시작한 것이 ‘더 이트맨 프로젝트’이다. WOW를 만들고 운영하는 지주회사 ‘더 플랫게이트 파트너십’의 회장 아드리안은 2010년 ‘더 이트맨’ 호텔 오픈을 시작으로 2020년 7개 박물관과 12개 레스토랑, 그리고 와인 저장고와 와인 스쿨, 갤러리 등을 결합한 WOW를 설립했다. 이 호텔과 WOW는 지역 관광 및 와인 산업의 핵심 명소로 자리잡았다. 포르투 주민 디아스(65)씨는 “WOW가 생기기전에는 거대한 와인 창고들이 비어있어 분위기가 스산했다”며 “잘못하면 골칫거리가 됐을 지역이 잘 바뀌었다”고 말했다.
WOW는 성공적인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평가 받는다. 기존에 회사 소유 와인 저장소를 재건축한 것이라 원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등 도시재생의 고질적인 부작용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수익성이 높은 시설들이 지역을 채워가면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민간기업의 자본투자와 지역 주민들의 협력으로 부작용이 최소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지역은 강북의 올드타운으로 몰렸던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주었다. 포르투로 신혼여행을 왔다는 김성희(35)씨 부부는 “다양한 와이너리 투어가 있어서 좋았다”며 “올드타운이 관광 위주였다면 이곳에선 남편과 함께 체험하며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 잠깐 싸우려다가도 시음하고 와인 설명을 듣고 취기가 오르다 보면 깜박한다”고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김씨의 말처럼 WOW는 ‘체험’의 공간이다. 와우에 들어선 박물관 7개 중 ‘와인 익스피리언스’란 이름의 와인 박물관에서는 포르투 특산품인 포트와인의 포도 품종부터 생산과정에 이르기까지 와인의 모든 면을 둘러보고, 나에게 맞는 와인이 무엇인지 시음할 수 있다.
포르투의 자랑이자 가장 유명한 생산품인 포트와인은 주정강화 와인이다. 일반 와인에 브랜디처럼 도수가 높은 술을 넣고 숙성해 달콤하고 알코올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포트와인은 와인의 한 종류이기도 하지만, ‘샴페인(Champagne)’처럼 생산지역을 특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포르투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포트와인이란 이름을 쓸 수 없다.
포르투갈 문어로 만든 피시 앤 칩스 인기
이곳에선 어딜 가나 포트와인의 기원을 지겹게 듣게 된다. 백년전쟁(1337년~1453년)으로 116년 동안 지겹도록 싸운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단단히 삐져 등을 돌렸다.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고 그중에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가 속한 가스코뉴(Gascogne) 지방도 있었다. 프랑스의 교역 중단에 자신들이 즐겨 마시던 와인을 당장 구할 길이 없자, 영국인들은 포르투로 이주해 와인을 생산하고 영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과 최단거리가 34㎞에 불과한 프랑스와 달리 포르투갈과 영국은 2000여㎞ 가까이 떨어져 있었고 배가 영국까지 닿는 길이 멀다 보니 와인이 상하는 일이 많았다. 이때 고안한 묘책이 브랜디다. 알코올 함량 40%에 육박하는 높은 도수의 술을 섞으면 발효에 관여하는 와인 속 효모의 활동이 멈춘다. 이렇게 아직 발효가 끝나지 않은 포도의 당분이 그대로 남아 일반 와인보다 알코올 도수는 높고 달콤함이 남아 있는 새로운 와인, ‘포트와인’이 탄생했다.
포트와인 시장을 영국의 상인들이 주도한 만큼 주요 포트와인 브랜드는 테일러·그레이엄 등 영국인들의 이름을 딴 게 많다. 더 플랫게이트 파트너십의 모태도 영국계의 포트와인 브랜드 ‘테일러스’다. 테일러스는 ‘포트와인의 원조’라는 ‘크로프트’와 ‘폰세카’ 등 유서 깊은 포트와인 브랜드를 잇달아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이곳 와이너리 투어 중 한국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건 한국어 가이드가 지원되는 테일러스다. 입장료는 20유로. 300여년 된 오크통이 가득한 저장창고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이색적인 느낌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와인 박물관과 와이너리 투어로 포트와인으로 그윽한 흥취를 장착했다면 그다음은 미식을 체험 할 차례다. WOW에 있는 12개의 식당은 각기 다른 매력과 컨셉을 뽐낸다. 우아한 파인 다이닝부터 정통 포르투갈 전통 요리, 감각적인 칵테일 바까지 다양한 선택지를 자랑한다. 포르투갈과 영국의 역사를 퓨전 음식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신선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더 골든 캐치(The Golden Catch)’에는 영국 전통 요리인 ‘피쉬 앤 칩스’를 포르투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 중 하나인 ‘뽈뽀(문어)’로 선보인 메뉴가 인기다. 지역주민 페르난두(44)씨는 “문어와 소 내장만 있으면 포트투인들은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다”며 음식을 추천했다.
음주와 미식으로 들뜬 마음을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싶다면 ‘브릿지 컬렉션’으로 발걸음을 향하면 된다. 아드리안 브릿지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와인 잔과 병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총 2000여 개의 잔과 병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000년에 만들어졌다.
전시는 역사 속 음용 의식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최초의 문명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 등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천년 전부터 시작해온 옛사람들의 음주가무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와이너리에서의 음주와 식당에서 느낀 포만감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조금은 옅어질지도 모른다. ‘아 다들 그렇게 살았구나’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