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과학전문지에 “가장 오래된 씨앗”이라는 제목으로 대추야자 나무 씨앗과 관련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대추야자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식물은 아니지만, 서부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사막지대의 물 근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성서 속 종려나무가 바로 이 나무를 가리키는데, 고대인들을 먹여 살려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다.
이 기사는 당시 2,000년 된 대추야자 씨앗이 유대인 마사다 요새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실험실로 가져가 발아에 성공했다는 기적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이전에 1,200년 전 연꽃씨가 발아한 기록은 있었으나, 2000년이라니. 놀라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대추야자 씨앗 발굴 이야기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루이스 보릭 국립의학연구소 사라 살론 박사팀은 이스라엘 마사다의 헤롯왕 요새를 수년 동안 발굴하던 중에 우연히 대추야자 씨앗 8개를 발견했다. 연도 추정을 위해 실험실에서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유전자 분석 등 수많은 시험을 진행했는데, 그중 씨앗 한 개가 발아한 것이다.
건조 토양의 항아리에 밀봉된 채 2,000년을 잠자고 있던 대추야자 씨앗의 발아는 경이로움, ‘현대에 눈 뜬 고대문명’이라는 상징성으로 연일 화제가 되었다.
발아한 싹에는 나이가 매우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메투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이 붙었다. 3여 년이 지난 후 메투셀라는 높이 1.5m까지 성장했고, 사이언스 등 식물학 저널에는 메투셀라의 발아와 생장을 다룬 논문이 발표됐다. 2011년 보고에 따르면 메투셀라는 완전한 식물로 자라 꽃을 피웠고 꽃가루는 현대의 암나무에 성공적으로 수분하였다고 한다.
메투셀라와 오래된 씨앗들의 최근 소식이 궁금했다. 찾아보니 이후 모두 32개의 씨앗이 추가로 발굴되었고, 메튜셀라를 포함한 7개 씨앗은 발아와 생육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들은 히브리어 성경 속 인물의 이름을 따 ‘아담’, ‘하나’, ‘우리엘’, ‘보아스’, ‘요나’, ‘유딧’ 이라고 불린다. 유전분석에 따라 기원은 유대 사막 지역의 고대 유적지인 마사다, 쿰란, 와디 마쿠크 등으로 확인되었다.
대추야자 씨앗의 발아와 재배 성공은 생물학적 신비로움을 넘어 그 시사점이 매우 크다. 고대의 묵은 씨앗일지라도 잘 보존되고 발아 조건이 적절히 유지된다면 수천 년이 지나도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적,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발굴된 종자의 기원을 찾아 당시의 농업기술, 식문화, 생태환경을 추측하는 데 간접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
종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전적 복원, 유용형질 보존, 멸종된 품종의 현대적 복원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고대 종자가 지닌 다양한 유전형질은 내건성, 내염성, 내냉성 등 기후 적응형 품종이나 병해충 저항성 품종 등을 개발하는 데 활용할 수 있어 농업기술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종자는 조건만 잘 유지되면 수분과 산소의 유입을 차단한 채 극한의 조건에서도 휴면 상태로 생명 정보를 유지한다. 그리고 다시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눈을 뜨고 싹을 틔운다. 이는 식물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시켜온 고도의 생존 전략이자 자연이 내려준 ‘생명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 등 지구생태계의 변화로 환경이 급속히 불안정해지며 씨앗들이 긴 시간 온전하게 활력을 유지하던 힘도 점차 줄어드는 모양새다.
그러므로 더욱더 생명 자원의 보존과 생물 다양성 유지를 위한 전략의 수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진흥청의 글로벌시드볼트(RDA Global Seed Vault)는 국가적 중요시설이자 시대적 소명을 담은 그릇이라 볼 수 있다.
농촌진흥청 시드볼트는 극한의 상황에서 식물 종자를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최적화한 종자 보존시설이다. 상시 영하 18도, 상대습도 40%를 유지한 환경은 물론, 완벽한 내진설계와 화재 예방 설비, 안정적인 전력공급 등으로 보존자원을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도록 관리 중이다. 그래서 시드볼트는 단순한 종자 저장 공간을 넘어 국가의 존속, 인류의 생명을 보장하는 전략적 기반시설로 평가받는다. 세계적으로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시드볼트가 최초로 설립돼 상징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어서 설립된 농촌진흥청 시드볼트가 세계 종자 보존 체계의 핵심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중요도와는 달리 시드볼트 사업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농촌진흥청은 사업 활성화를 위한 기관 간 협력에 나섰으며,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 6월 17일 농촌진흥청에서 국내 시드볼트 발전협의회가 열렸다. 농촌진흥청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구축해 온 글로벌 시드볼트 사업과 국내외 식물 종자 30여만 자원의 안전중복보존서비스 성과 등을 소개했다. 또한, 세계 식량위기가 심화하는 가운데 세계 식물유전자원 안전중복보존과 식량안보를 위한 시드볼트의 역할을 돌아보고 사업 활성화 협력방안 등도 논의했다.
시드볼트 사업은 단순한 종자 보존 사업이 아니다. 전 세계 농업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국제적 안전망의 핵심이기에 더욱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기관 간 협력으로 사업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농촌진흥청도 스발바르 시드볼트와 긴밀히 협력하고 상호 보완하며 글로벌 유전자원 보존 체계 내에서 동등한 책임 주체이자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 매김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다.
남성희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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