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나르시시스트, 5세대 소녀들

2025-09-05

2025 K팝 걸그룹 키워드

무척이나 추웠던 지난 연말, 서울 여의도의 검은 밤은 무지갯빛으로 밝아졌다. 드론 샷이 보여준 그 밤의 캔버스는 네온의 점묘화였다. 클로즈업하면 그 점들은 다시 노랑, 빨강, 분홍, 초록의 색색깔로 분광됐다. 둥글고 뾰족한 다종의 형태로 분화했다. 응원봉들이다. 이제 그 화면의 볼륨을 키워 보면, 뜨거운 노래들이 들린다. ‘광활한 만주 벌판~’ 대신 ‘(Can’t touch that)Whip-Whiplash’(에스파 ‘Whiplash’)가, ‘태양’과 ‘묘지’ 대신 ‘슬픔’과 ‘안녕’(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세계는 일상을 되찾았다. 밤은 다시 적당한 색으로 조율됐고, 모였던 빛은 흩어졌으며, 케이팝 월드도 늘 그랬듯 ‘평온한’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세계가, 다른 관점에서, 서울을 주목한다. 가상의 걸그룹 헌트릭스가 국내외 차트를 접수했다. 블랙핑크는 신곡 ‘뛰어(JUMP)’로 또 1억 조회수를 넘겼고 북미, 유럽 스타디움 투어를 파죽지세로 해나가고 있다. 바야흐로 걸그룹의 시대인가.

차세대의 지형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세칭 원카소(원더걸스, 카라, 소녀시대), 트레블(트와이스, 레드벨벳, 블랙핑크), 뉴아르(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 또는 에이스(에스파, 아이브, 뉴진스) 등의 키워드로 팬 커뮤니티를 달구던 ‘빅3론(論)’은 요즘 찾기 힘들다. 신인그룹은 무수히 쏟아지고 있지만 수퍼스타의 명찰을 단 그룹은 보기 힘들다.

유력 기획사 루키들도 마찬가지다. SM의 하츠투하츠(8인조·2월 데뷔), YG의 베이비몬스터(7인조·2024년 데뷔), 더블랙레이블의 미야오(5인조·2024년 데뷔),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키키(5인조·3월 데뷔)는 때로 반짝였지만 폭발하진 못했다.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등이 데뷔 6개월 내에 강력한 신드롬이나 1, 2개 이상의 Top 10 히트곡을 터뜨린 것을 생각하면 뭔가 다르다. 대세는 없다. 대신 스펙트럼은 넓어졌다. 둘러보는 재미, 톺아보는 맛은 되레 더해진 셈이다. 유심히 보면 뜻밖의 흐름도 발견된다.

흥미로운 키워드는 ‘고양이’와 ‘나’다. 먼저, ‘나’. 미이즘(Meism·‘나’ 중심주의)은 Z세대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다. ‘I HAVE’의 축약형인 아이브(IVE·2021년 데뷔)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팬데믹의 장벽을 때려 부수고 성공한 이 그룹의 영향일까. 미이즘을 전면에, 또는 간접적으로 내세운 걸그룹이 넘쳐난다.

춘추전국시대, 원톱 없지만 둘러보는 재미

스타쉽의 키키(KiiiKiii)에는 작은 ‘나(i)’가 무려 여섯 번 반복해 들어가 있다. 3월 데뷔곡 제목부터가 ‘I DO ME’였다. 내용은 제목대로 ‘내가 나 한다’는 노래다. ‘난 나답게 더 빛나져’ ‘내 상상보다/더 큰 나였어’ 같은 가사가 푸른 초원 위로, ‘콩 무당벌레’를 싣고 거침없이 펼쳐진다. 이 곡으로 키키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그룹들에 비해 가장 먼저 소기의 성공을 거두며 떨쳐 나갔다. 그룹명이 미(ME)로 시작하는 더블랙레이블의 미야오는 7월 말 신곡 제목으로 ‘ME ME ME’를 냈다. 일본 브랜드와 협업한 곡이긴 하지만 ‘Love that babe/looking in the mirror’의 도입부부터 ‘me me me’의 반복구까지 미이즘으로 도배된 노래다. 6인조 이프아이(4월 데뷔)도 표기는 ‘ifeye’이지만 ‘If I’의 중의법도 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일릿(5인조·2024년 데뷔)은 그룹명에서 ‘I Will’과 ‘It’을 줄여서 붙였다. ‘SUPER ME’(상상 속의 초월적 자아)와 ‘REAL ME’(현실적 자아)를 오가는 세계관이 바탕이다.

걸그룹 월드의 ‘I’ ‘ME’ 물결은 어디서 온 걸까. 아이돌은 오랫동안 저 먼 무대 위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우상(idol)임이 마땅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 노래할 때 텔레비전은 국내 극소수 매체만이 틀어쥔 ‘어른들의’ 매스미디어 스크린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바일 시대다. 숏폼 제국이다. 수업 간 쉬는 시간에, 직장에서 티타임 할 때 몇 분, 몇 초 짬에 친구, 동료들과 댄스 챌린지를 찍는다. 그러면 반짝이는 아이돌과 같은 스크린(나와 내 친구들은 물론 불특정 다수의 휴대전화 안)에서 동등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큰 ‘I(dol)’는 언제든 나처럼 작은 ‘i’와 연결되며 동질화된다. 적어도 ‘모바일 네이티브’로 불리는 Z세대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간다.

넘실대는 ‘나’의 세계에서 반짝이는 가능성을 표상하는 타자는 고양이다. 룰라 김지현의 ‘Cat’s Eye’나 티아라의 고양이 콘셉트 곡 ‘Bo Peep Bo Peep’이 보여준 관능의 아이템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가 그려낸 세기말 아웃사이더 낭만도 아니다. 지금 고양이는 숏폼을 지배하는 외계인 같은 존재다. 외롭지만 욕망과 현재에 충실하다. 이기적이지만 만인에게서 조건 없는 사랑을 독차지하는 롤모델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다. 동그란 얼굴의 아기상(象)이지만, 수염과 무표정을 장착한 애어른이기도 하다. 제 맘대로 해도 사랑받고 멋대로 어지럽혀도 예쁨 받는 도도한 ‘핵인싸’다. ‘나=고양이’일 때 수퍼 소비자는 수퍼 생산자도 된다.

아일릿의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는 ‘네 맘속 그 아이’에 대해 ‘애매모호/알 듯 말 듯 암호’로 표현하며 빠른 고양이의 반응 속도를 음악으로 치환해 들려준다. ‘Do do do do do do the da da/Da da da da da da da dance’로 정신없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선율과 템포는 그 자체로 2배속 스페드업(sped-up) 버전 같다. ‘꿍실냐옹’ ‘둠칫냐옹’의 정체불명 귀여운 여음구도 반복된다.

미야오(MEOVV)는 아예 그룹명부터 영어식 고양이 울음소리다. 팬 소통 전용 애플리케이션의 이름은 ‘츄르(Churrrrr)’로 지었다. 고양이 최애 간식 이름이다. 미국 현지화 다국적 걸그룹으로 주목받는 캣츠아이(KATSEYE·6인조·2024년 데뷔)는 빛을 반사하는 고양이 눈처럼 다채로운 매력을 강조하는 팀이다.

세진 본토 파워…해외 본진 둬도 한국 스케줄

지금 걸그룹 월드는 사실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없다.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그 폭이 확장일로다. 가장 먼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쪽은 국가의 벽이다. 캣츠아이는 한국의 하이브가 미국의 게펜 레코드와 합작해 미국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낸 다국적, 다인종 그룹이다. 중국계, 일본계 일변도이던 비한국-아시아계 멤버들도 면면이 더 다채로워지고 있다. 하츠투하츠의 카르멘은 대형 기획사 최초의 인도네시아인 멤버다. 베이비몬스터는 태국인 멤버가 둘이나 된다. 멤버 7인 중 한국인 멤버는 3인으로 오히려 소수다.

케이팝과 제이팝의 경계마저 흐물흐물해진다. 일본 걸그룹 코스모시(4인조·4월 데뷔)는 지난달 16일 경기 과천에서 열린 ‘원 유니버스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NTT 도코모 스튜디오 & 라이브 소속’이고 전원 일본인이지만, 무대에서는 한국어로 소통했다. 지난해 CJ ENM이 일본판 프로듀스101인 ‘프로듀스101 재팬 걸즈’를 통해 일본과 합작해 낸 현지 걸그룹 미아이(11인조·2024년 데뷔)도 한국어와 한국 유행을 익히면서 틈틈이 한국 음악 방송에 출연한다.

이수만 SM 전 회장이 미국과 중국 멤버로 만든 걸그룹 A2O MAY(2024년 데뷔)의 행보도 관심사다. 이 전 회장의 한국 내 경업(競業)금지 조항이 내년 중 풀리면 A2O MAY나 다른 해외 기반 그룹들이 어떤 활동을 벌일지 주목된다.

걸그룹 월드가 커질수록 ‘본토’의 영향력은 세지고 있다. 미국에 본진을 둔 캣츠아이는 상반기 일주일 남짓을 통으로 빼 한국에 입국했다. 5월 1일부터 4일까지 4일간 엠넷, KBS, MBC, SBS 음악 방송을 모두 도는 ‘서울 강행군’을 진행한 것이다. 이때 부른 ‘날리(Gnarly)’ 영상이 바이럴되며 빌보드 싱글차트에 입성하고 8월 미국 시카고 롤라팔루자 페스티벌 무대에 수만 명을 집결시켰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똑같이 무대를 꾸며도 30년 노하우가 있는 한국 촬영감독의 카메라워크, 편집 스태프들이 뽑아내는 안무와 표정 클로즈업을 만나면 케이팝 특유의 ‘도파민 폭탄 영상’이 된다”고 말했다.

젠더의 외연마저 넓어진다. 올해 캣츠아이의 두 멤버가 성소수자임을 밝힌 것은 케이팝 세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걸그룹은 이제 더 이상 ‘예쁘고 늘씬하며 여성적 매력을 앞세운 인간 댄스 팝 그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판을 키운 버추얼 걸그룹, 뜻밖의 대세로 떠오른 밴드형 걸그룹,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작지만 독특한 신을 형성한 지하 아이돌 걸그룹이 각자의 세력을 확장 중이다. 올해 혼성 케이팝 그룹 ‘올데이 프로젝트’의 대성공도 ‘보이그룹 또는 걸그룹’이란 지형을 흔들어놨다.

판이 진동한다. 산명진동하는 그 판 위에서 균형 잡고 오뚝 선 영웅은 아직 없다. 재미나고 자극적인 콘텐트의 세계는 N스크린, 숏폼, 인공지능을 만나 우주처럼 팽창한다. 시선 둘 곳은 무한으로 많아진다. 이 시대를 평정할 차세대 ‘빅 네임’은 이 시간에도 뚜벅뚜벅 소리 없이 2026년을 향해 걷고 있을 것이다. 난세의 안갯속에서도 늘 ‘다음의’ 사람들은 왔고 기어이 나타났으니까. 설렘의 파이는 아직 더 남겨두기로 한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 뮤직 컨설턴트. 하이브,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에서 강연했고 BBC, 아사히에 한국 문화에 관한 도움말을 줬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 뮤직 컨설턴트. 하이브,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에서 강연했고 BBC, 아사히에 한국 문화에 관한 도움말을 줬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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