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방송 기다린다”는 ‘언더피프틴’, 진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2025-03-26

“아동 인권을 퇴행시키는 데 미디어가 나서겠다는 공표나 다름없다.”

- 노새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

“어린 참가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정말로 상처를 주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 김지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

15세 이하 여성 아동·청소년을 모아 걸그룹 오디션을 진행하는 MBN 프로그램 ‘언더피프틴(UNDER15)’ 방영을 앞두고 시민 사회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사전에 공개된 출연자의 모습이 성인 여성을 연상시키는 데다 출연자 중에는 만 8세에 불과한 아동도 있어 ‘아동 성 상품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방송 후 마주치게 될 악성 댓글과 사회적 압박에서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여성·청소년 등 129개 단체 “MBN은 ‘언더피프틴’ 폐지 선언하라”

여성·언론·청소년·교육 등 분야의 129개 시민 사회 단체는 26일 오전 서울 중구 MBN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언더피프틴’ 방송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공동 기자회견문에서 “이번 사건은 한국 방송산업 전반에 여성 아동·청소년의 인권과 성인지 감수성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방송사 MBN과 제작사 크레아스튜디오를 향해 각각 ‘언더피프틴’ 방송 계획을 철회하고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할 것, 제작·홍보 행위를 전면 중단하고 방송 제작분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여성가족부에도 여성 아동·청소년 대상 오디션·연예 콘텐츠 전반에 대한 기준을 수립하고 성적 대상화 및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현장 발언에서 노새 민우회 활동가는 “우리 공동체가 합의하고 있던 최소한의 상식선을 ‘글로벌 최초로’ 저 아래로 추락시키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아무리 출연자의 꿈과 열정과 의지가 대단하고 배려와 보호자의 ‘동의’가 넘쳐난다고 한들 이런 방송이 용납돼선 안 된다”고 밝혔다.

김지연 전교조 부위원장은 “제작진은 참가자를 방패로 세우고 자신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굴고 있다. 방영되고 나서 참가자들이 온라인 괴롭힘과 성폭력에 노출돼 고통받더라도 ‘참가자의 의사를 확인했으니 괜찮다’고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언더피프틴’은 MBN이 오는 31일 첫 방영할 예정인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을 연이어 성공시킨 서혜진PD가 공동대표로 있는 크레아스튜디오가 제작을 맡았다.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방영됐으나 ‘언더피프틴’은 ‘글로벌 최초 15세 이하 K팝 신동 발굴 프로젝트’라는 콘셉트를 차별화 지점으로 내세웠다. 국적 상관없이 15세 이하 여성 아동·청소년을 참가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 세계 70여개국에서 참가자 59명이 선발됐다.

방송이 다가오며 여성·청소년 관련 단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아동 성 상품화를 우려하는 비판이 다수 제기됐다. 티저 영상과 홍보 이미지에서 앳된 모습이 가시지 않은 참가자가 성인 여성처럼 화장하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모습, 참가자의 프로필 이미지에 바코드를 배치해 참가자를 마치 ‘상품’처럼 연출한 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또한 참가자 59명 중 5명은 2016년생으로 만 8세에 불과했다.

비판이 커지자 지난 21일 MBN은 “신규 프로그램 ‘언더피프틴’과 관련해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우려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프로그램 세부 내용은 물론 방영 여부 등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제작사는 방송 분량을 일부 미리 공개하고 해명에 나서며 MBN과는 다소 엇갈리는 행보를 보였다. 크레아스튜디오는 지난 22일 자체 유튜브 채널에 약 31분 분량을 선공개했다. 지난 25일엔 긴급 간담회를 열어 “억울하다”, “아이들이 방송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 자리에서 서혜진 공동대표는 “제작진은 어린 친구들을 성 상품화했거나, 이들을 이용해 성 착취 제작물을 만들지 않았다”며 “엄청난 오해가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바코드에 대해선 “학생증 콘셉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친구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는 학교”라고 설명했다.

한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로부터 이미 판단을 받았다’는 제작사 측의 주장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전날 간담회에서 서 대표는 “이미 녹화된 영상을 편집해 방심위 사전 심의를 받고 있다. 2주 전에 벌써 방심위에 완본을 보냈고 그분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내부적으로 검토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방심위는 즉각 반박했다. 방심위는 해명 자료를 내 “방심위는 이미 방송된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심의 규정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사후심의’를 하고 있다”며 “방송 이전에 완본 프로그램을 받은 바 없고, 이를 검토해 의견을 전달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 “공개석상에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한 크레아스튜디오 측에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했다”고 했다.

이러한 제작사 측의 해명에 대해 김정덕 정치하는엄마들 스쿨미투 대응팀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이들’을 앞세우며 ‘학교’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어린이·청소년의 욕구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상술을 가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린이·청소년기 사회적 평가 압력에 두뇌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기획, 제작에 신중히 임해야 하는 것은 방송의 기본 책무”라고 밝혔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임대표 또한 “같은 연령이라도 기획사에서 연습생으로 훈련받으며 준비된 상태로 대중 앞에 서는 것과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외모, 실력, 성격까지 모두 평가받는 상황과 위치에 놓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짚었다. 이 대표는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또래 아동까지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제작진은 과연 이 모든 영향을 충분히 고려했는지 기획 의도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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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이 다른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 여성 연예인이 ‘딥페이크’(불법 합성물)의 주요 피해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사이버 보안 업체 ‘시큐리티히어로’를 인용해 딥페이크 제작물에 등장한 사람 중 53%가 한국인이며, 이는 대부분 한국 여성 연예인이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가장 많이 활용된 10명 중 8명이 한국인이었다.

한편 여성의당은 지난 23일 엔터산업 내 불공정계약, 성착취 등 부당한 대우를 당한 여성의 피해 사례를 수집한다고 밝혔다. 여성의당은 “심각한 수준의 착취와 폭력이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으나 관련 사례와 데이터조차 제대로 수집·관리되고 있지 않다”며 성범죄 피해, 술자리·노출·성인방송 출연 강요, 수익 정산 지연, 무리한 다이어트 및 성형 강요, 학습권 침해 등을 겪은 사례를 제보해달라고 밝혔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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