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민중의 정치에 관해, 민중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나이 많은 학교 친구 셋이 영국군 훈련을 받는 136부대에 들어가 이포에서 멀지 않은 정글 지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용기를 우리 모두 선망했고, 인도 친구 하나가 작전 중에 일본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했다.
둘은 살아남았으나 전쟁 후에 학교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한 사람, 말레이인은 정규군에 들어가 말라야군 장교가 된 것으로 안다. 또 한 사람은 중국인으로 내 급우 둘의 형인 체옹콕잉(張國英)이었다. 그는 런던의 전승 퍼레이드에서 말라야인민항일군(MPAJA)과 함께 행진하고 미국으로 공학을 공부하러 갔다. 그 경험을 통해 중국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그는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연구를 끝낸 후 중국으로 가서 로켓 개발에 종사했다. 1950년대에 그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행을 결정했고, 탄 배가 상하이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렀을 때 부모님이 배에 올라 만났는데 배에서 내리지도 않아 부모님이 실망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 후 그가 중국 과학기술계에서 활약하는 소식이 이따금 들렸다. 1960년대 후반 문화혁명 중 그의 자살 소식은 충격이었다. 부르주아 생활방식과 책과 음악 등 서방 문물에 대한 기호가 홍위병 비판을 받은 결과였다. “해외 관계”도 비판 대상이었다. 적과의 협력을 암시하는 끔찍한 죄목이었다. 애국심 때문에 중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나 해외의 친척들과 연락을 유지하던 사람들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한 딱지였다.
덩샤오핑 개혁으로 출국이 허용된 화교들을 1980년대 홍콩에서 많이 만났다. “부역자” 배경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핍박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고 학교 다닌 사람들은 공포 분위기가 극심한 시절에 자기네끼리 자바어로 대화하던 이야기도 했다. 자기네 불평이나 비판을 밀고당할 위험 때문이기도 하고, 공유하는 정체성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주 다른 운명을 맞은 급우 하나도 생각난다. 중국인인데 일본군이 만든 민병대에서 일했고 전쟁 후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과 함께 부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그 밖에도 여러 지방에서 중국인 무장집단이 일본군 아래 말라야인민항일군과 싸운 말레이인 경관들을 죽인 뉴스를 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전범재판의 절차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고 영국 군정부가 전쟁 중의 죄악을 제대로 심판하리라는 믿음도 없었다.
그림이 선명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정복의 명분으로 아시아인이 힘을 합쳐 백인을 몰아내자는 선전을 폈다. 말레이인이나 인도인이나 지역의 민족주의자 중에는 그 선전에 넘어가 자기네 나라의 독립을 위한 기회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말레이인 몇은 비슷한 입장의 인도네시아 청년들과 함께 훈련받으러 일본에 가기도 했다. 많은 인도인도 본국의 반영 민족주의에 호응해서 수브하스 찬드라 보세가 일본의 지원으로 조직한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에 참여했다.
[역주: 수브하스 찬드라 보세(1897-1945?)는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반대하며 인도의 즉시 독립을 요구하고 무력투쟁을 제창했다. 공산주의자인 보세는 1941년 초 영국 경찰의 감시를 피해 소련으로 갔으나 소련이 응하지 않았으므로 독일로 갔다가 1943년 초 일본으로 갔다. 일본군은 싱가포르 등지에서 많은 인도인 포로를 확보하고 있었고 민족 지도자로서 보세의 명망은 포로들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군 점령지역의 인도인 주민들도 보세의 인도국민군을 지원했다. 보세는 임시정부를 세워 추축국의 승인을 받았다.
인도국민군 대원들은 종전 후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영국 측 선전처럼 일본의 괴뢰군이 아니라 인도 민족주의에 입각해 자발적으로 만든 군대로 알려지면서 인도인의 반영 감정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보세 자신은 1945년 8월 18일에 일본으로 가던 비행기가 타이페이 부근에서 추락할 때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사고는 확인되지 않았다. 인도 정부는 1992년 죽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바라트 라트나 훈장을 보세에게 수여했는데, 이 훈장이 후에 대법원 결정으로 취소되었다. 취소 이유는 보세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왕징웨이 ”국민당“의 추종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중국인은 일본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고 그저 자신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지냈을 뿐이다. 더러 저항에 나선 사람들은 장래 말라야 국가의 독립을 위해 말라야공산당이 가장 중요한 조직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전쟁 후 돌아온 영국인들에게 전에는 그럭저럭 통제해 오던 두 가지 문제가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경영자들, 특히 일본점령기에 돈을 벌었다고 여겨지는 경영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적 태도가 심해졌다. 민족항일군의 공산분자들이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그 위에 민족 간 긴장이 악화했다. 영국과 중국에 충성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말레이인을 우대한 일본의 분열 정책 때문이었다. 갈등이 폭력으로 자라나면 나라가 조각날 판이었다. 두 문제 모두의 바닥에 깔린 것이 부역 문제였고, 당국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문제였다.
일본점령기의 말라야에 중국의 왕징웨이에 비교할 만한 반역행위가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옹쳉후이, 제임스 무라가수, M. 쿠라마사미, 아미누딘 바키 등 제일 가까운 학교 친구들과 함께 우리 같은 복합사회에서의 충성심을 토론하고 지역의 다른 식민국가들과 비교해 보았다. 복잡한 문제인데, 일본인이 중국에서 한 짓을 알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특히 복잡한 문제라고 다들 의견이 모였다.
반일활동 때문에 중국인을 의심하고 핍박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일본인들이 다른 민족들을 대한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다. 영국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는 말레이인들에게는 언젠가 자기네 독립된 나라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일할 것을 권하면서 유럽인 아닌 아시아인이 이끌어가는 아시아의 새 시대를 여는 데 일본이 앞장설 것이라고 장담했다.
독립의 기회를 찾아 일본에 협력했던 말레이인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영국인들의 망설임을 우리는 알아볼 수 있었다. 말레이인의 주권이 인정될 것이고 권리가 회복될 것이라고 많은 영국인들이 확인해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차츰 분명해졌다. 관리들은 말레이 군주들이 인도네시아의 공화주의에 위협을 느끼고 일반 말레이인들이 중국계와 인도계 이주민들의 경제 지배를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다. 영국인들은 이제 자기네가 돌아왔고 말레이인을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자기네가 데려다 놓은 비-말레이인 상공업 종사자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장해 줄 필요도 있었다.
말라카해협 건너편에서는 일본점령기에 육성된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부역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돌아오는 네덜란드인들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고 일본 군부에 가장 가깝던 사람들이 오히려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버마에서도 영국인과 싸우도록 일본인의 훈련을 받은 군대가 영국 지배의 회복을 거부하고 영국인을 최대한 빨리 떠나게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인도네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에서 새 국가의 정부를 세우고 애국자로 환호받는 사람들이 나왔다.
[역주: 버마의 아웅 산(1915-1947)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1901-1970)가 일본의 “대동아” 구호에 호응한 대표적 독립운동 지도자들이었다.]
필리핀은 훨씬 더 미묘한 상황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전쟁 전에 독립의 약속이 있었고 전쟁 중 마누엘 케손 대통령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미국과 연합군 편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점령하 마닐라에서 행정에 종사한 사람들은 난처해졌다. 돌아온 미국인들은 필리핀 독립의 지원 방침을 바로 선언하면서 부역 문제는 너무 따지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전쟁 중의 부역에 대한 내 관심은 이포에서 학교를 마치기 전에 충족되어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본 군사지도자들을 전범으로 판결한 도쿄 전범재판의 결과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나는 중국 괴뢰정권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 소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난징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가 왕징웨이의 범죄에 관한 최근의 논쟁을 특별히 거론하고 그 추종자들이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은 사실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그래서 놀라웠다. 이제 우리도 중국에 왔으니 만날 사람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나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깨우쳐 주시는 것 같았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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