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정상회담 참고서

2025-08-20

이재명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초청으로 24~26일 미국을 ‘공식 실무 방문’하게 된다. 요즘 백악관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다. 트럼프가 촉발한 관세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또 트럼프가 해결사를 자처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중동 분쟁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분주히 오간다.

기록을 찾아보니 지난 1월 트럼프 취임 후 이달 중순까지 미국을 방문한 정상급 지도자는 최소 29명이다. 이 대통령과 회담하고 나면 그 숫자는 30명을 넘게 된다. 트럼프 1기 첫해 같은 기간(1~8월)의 27명보다 많다. 바이든 행정부의 9명보다 확실히 늘었다. 백악관 문 앞이 더욱 붐빈다는 건 양자 관계에서 트럼프의 권력이 커지고 그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한층 시급해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생중계되는 ‘오벌 오피스 회동’

트럼프, 국내정치에 활용하기도

평정심 유지, 필요하면 추후 대응

이번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에겐 도전적인 기회다. 외교 또는 외국과의 협상이 낯설 텐데 하필 상대가 ‘협상의 달인’ 트럼프여서다. 더구나 그의 홈그라운드에서. 트럼프는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규범 파괴를 즐긴다. 때로는 의전을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한다. 천부적인 포퓰리스트인 트럼프는 국민이, 아니 지지자들이 듣고 싶은 말, 보고 싶은 장면을 만들 기회를 포착하면 놓치지 않는다. 총알이 귀를 스쳐 피가 흐르는데도 엄호하는 경호원들을 제치고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어올린 유세 장면이 대표적이다.

성공적인 회담을 위해선 트럼프라는 사람 자체를 파악하고 대비하는 게 필요하다. 협상 의제를 공부하고 전략을 짜는 일보다 결코 중요함이 덜하지 않다. 물론 관세 협상과 산업 협력, 국방비 증액,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을 포함한 한미동맹 현대화 등의 양국 간 의제 논의가 이 대통령을 초청한 주된 이유다. 다만, 트럼프는 외국 정상과의 회담도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활용하는 게 몸에 밴 정치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상회담 일정 중 트럼프가 ‘국내용’으로 활용하기 좋은 행사는 ‘오벌 오피스 방문’이다. 외국 정상이 백악관에 도착하면 트럼프 집무실에서 나란히 앉아 각자 모두 발언을 하고 기자단 질문을 받는다. 이 행사는 약 20~30분간 생중계된다. 짜인 틀이 없다. 트럼프가 어떤 화두를 꺼낼지, 어느 기자가 무슨 질문을 할지, 언제 끝날지조차 예측하기 어려워 외국 정상들이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반면에 ‘생방송 달인’ 트럼프는 가장 즐기는 시간이다. 트럼프는 지지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던지는 걸 좋아한다. 방송 출연이 그날의 가장 중요한 일정인 경우가 많다. 정상회담 때도 예외가 아니다. 오벌 오피스 일정을 국내 정치에 활용한 흔적은 많다. 지난 2월 트럼프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고함치며 격렬한 논쟁을 벌인 뒤 오찬까지 취소하며 쫓아낸 사건이 대표적이다. 종전을 밀어붙이는 한편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지원에 불만이 쌓인 미국인들을 의식해 한바탕 소란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있었다.

지난 5월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오벌 오피스를 방문했을 때 ‘백인 학살’ 의혹 영상을 틀며 이슈화한 것도 사례로 꼽힌다. 영상 자체가 거짓으로 드러났고, 여러 사실관계가 틀렸음에도 트럼프는 개의치 않았다. 라마포사 방미 일주일 전 트럼프가 자주 보는 극우 성향 매체에 남아공의 백인 차별 문제를 지적한 기사가 큼직하게 실린 것을 근거로, 지지층과의 소통이 목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트럼프로부터 ‘매복’ 공격을 당한 라마포사의 대응은 참고할 만하다.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로 “사실과 다르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후 별도로 기자회견을 열어 남아공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자기 청중을 염두에 둔 트럼프의 행동을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지난 2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도 오벌 오피스에서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평을 들었다. 트럼프는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이주시키고 가자지구를 갖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국왕에게 이주민 수용을 요청했다. 국왕은 트럼프가 전임자보다 더 큰 업적을 남길 것이라고 추켜세우는 외교 기술을 선보인 뒤 회담 종료 후 소셜미디어에 미국의 계획에 반대하며 이주민 수용 요청도 거절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라마포사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농담을 했다. “많은 남아공인이 우리가 ‘Z’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우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건 오지 않았다.” ‘Z’ 순간은 젤렌스키 설전을 말한다. 요즘 유행어로 ‘Z 모멘트’는 우리에게도 오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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