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교사 A씨는 지난해 한 학부모의 밤낮없는 연락에 시달렸다. 해당 학부모의 자녀는 학교 적응을 힘들어했는데, 학부모는 자녀와 관련된 사소한 일로도 일주일에 몇번씩 A씨에게 전화를 했다. 연락은 자정이 다 된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도 계속됐고, 한번 연결이 되면 몇십분씩 통화가 이뤄졌다. A씨는 “학생에게 진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일주일에 10번이든, 20번이든 연락할 수도 있지만 통화내용은 ‘아이가 오늘 기운 없어 보이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 없었냐’ 등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통화를 하다 보면 학부모의 고민 상담 전화 같았다”며 “이런 전화가 일주일에 몇번씩 1년 내내 이어지니 나중엔 전화벨만 울려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A씨는 학부모의 전화로 괴로웠지만, 학교 측에 도움을 요청하지는 못했다. A씨는 “학부모가 욕설 등을 한 것은 아니어서 교권침해라고 얘기하기가 좀 애매했다. 이 정도는 그냥 교사니까 참고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냥 빨리 시간이 지나서 아이가 다른 반에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년 전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2년 차 교사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 이후 교육 당국이 민원 관련 대책을 내놨지만, 학교 현장에선 여전히 많은 교사들이 민원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에는 제주에서 또 다른 교사가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중·고교 교사들은 “교사 휴대전화가 민원 창구로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학교 민원 대응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원 창구’ 전락한 교사 휴대전화
28일 교육계에 따르면 2023년 서초구 교사 사망 사건 이후 교육부는 각종 학교 민원 대응 대책을 내놨다. 이후 일부 변화는 있었다. 학부모 사이에서 교사에게 연락하는 것을 전보다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인식이 퍼졌고, 초등학교의 경우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소통이 늘면서 교사들의 개인 번호를 공개하는 일이 거의 줄어들었다.
다만 중·고등학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경기의 한 중학교 교사는 “중·고교 교사들은 학부모뿐만 아니라 학생들하고 직접 연락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아 학생들에게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며 “어쩔 수 없이 개인 번호가 학부모들에게도 노출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실제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이 이달 초 중·고교 교사 1만95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8%는 학생 또는 학부모에게 개인 휴대전화번호를 공개했다고 답했다. 특히 87.3%는 공식 민원 대응시스템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교사들은 근무 외 시간에도 학부모 등이 연락을 요구하면서 소통 부담이 가중되고, 사생활 침해 우려도 높다고 호소했다. 중등교사노조는 “민원 대응 창구 부재 등으로 교사 번호 공개가 사실상 구조적으로 강제되고 있다”며 “출결확인, 생활지도, 민원 응대 등이 모두 개인 번호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밝혔다.
노조의 설문에서 한 교사는 “수업 전 조회를 할 때 학생이 없으면 바로 출결확인을 위해 전화를 해야 하는데 유선전화는 교무실에 있어서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해 연락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또 다른 교사는 “각종 평가 관련 공지들을 구두나 서면으로만 할 경우 가정에 전달이 잘 되지 않아 단톡방 등을 통해 공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교사들은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학부모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올 수 있다고 토로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출결이 민감하다 보니 학부모로부터 출결 관련 연락이 많이 온다”며 “교사 휴대전화로 바로 연락이 안 되면 더 큰 민원이 올 수 있어서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각 처리를 지워달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가 올 때도 있는데 안 들어주면 계속 연락하고 폭언을 하는 경우도 많다”며 “휴대전화를 2개 개통해서 하나를 아예 업무폰으로 쓰는 교사도 있는데 이런 것을 교육 당국이 해주지 않고 교사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민원 공식 시스템 필요”
중등교사노조는 지난달 제주의 한 중학교에서 숨진 채 발견된 현승준 교사 사건은 교사의 휴대전화가 사적 민원 창구로 전락한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현승준 교사는 사망 전 학생 가족의 잦은 연락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학생의 가족은 하루에 많게는 12번이나 전화했고, 새벽 6시나 자정에 연락한 기록도 있었다.
중등교사노조는 “출석 여부를 확인하거나 단순한 행정 연락조차 교사의 개인 연락처를 통해 이뤄져야 하는 구조 속에서 교사는 혼자서 모든 비난을 감당하며 고립되었다”고 밝혔다. 공적 시스템이 없어 사적 부담이 전가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교사들은 교육 당국이나 학교장 등이 악성 민원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초·중등교육법에 따르면 ‘교장은 교무를 총괄하고, 민원 처리를 책임지며, 소속 교직원을 지도·감독하고, 학생을 교육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민원 처리는 오롯이 교사들의 몫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경북교사노조가 경북 교사 142명을 대상으로 학교 민원 시스템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 ‘학교 민원 처리를 학교장이 책임지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6.8%에 불과했다. 경북교육청의 경우 각 학교에서 학교장을 포함해 ‘학교민원대응팀’을 구성하고, 특이 민원은 교사 개인이 아닌 민원대응팀에서 접수 후 대응하도록 하고 있지만 응답 교사의 절반 이상(56%)은 ‘민원대응팀의 존재가 잘 안내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교사들은 교육 당국이 학교 단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식 민원 접수·처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등교사노조는 “학부모·학생과의 연락은 공용 메신저 및 행정시스템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명확히 규정하고, 출결시스템도 애플리케이션 등으로 하도록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며 “교사의 개인 번호 공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한 개인정보 보호 고시를 교육부와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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