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은 조선 사람이 자유민임을 실감하며 식민지에서 억눌렸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 기점이었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귀환하고, 곳곳에서 선언문이 낭독되며 정치 조직이 꾸려졌다. 이렇듯 해방 공간의 역동성은 정치적 주체가 된 남성·청년의 도전과 모험의 서사로 읽히기 쉽지만, 해방은 식민지와 가부장제라는 이중 구속에 놓인 여성들에게 주어진 감격의 모멘텀이었다. “낡아 빠진 인고 속에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 선구자인 여학생들이 인형의 집을 못 뛰쳐나오면 누가 나올 것인가”(박대룡 ‘여학생과 노라’, 경향신문 1947년 1월 19일)라는 사설은 8·15의 시간성 속에서 여성들이 남자의 팔짱을 끼지 않고도 자립 보행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이 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월남 작가인 박순녀(朴順女·1928~)는 여학생의 가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후예를 자처하는 해방 세대 여성들의 존재를 증언한다. 무단가출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소설은, 보호자 없이 여러 차례 38선을 넘었던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22년 경성공립여자보통학교 여학생들이 자수를 놓는 사진에 관한 박순녀의 에세이(‘남녀평등 시대의 수틀’)는 ‘월경(越境)’이 여성의 성숙을 가로막는 후견인들과 제도적·이데올로기적 족쇄로부터의 탈주임을 암시한다. 작가는 “머리 위의 찬란한 햇빛만이 필요해서 목을 쳐들고 그것을 찾고 있다”며 여학생들을 행복한 예비 규수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라면 밤봇짐을 꾸려 쏜 화살처럼 집을 떠날 열정의 소유자로 해석한다. 그 여학생 중의 하나였던 박순녀는 남한에서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교사, 방송국 작가, 번역가, 소설가로 활동했다. 월남민 작가 김이석과 재혼 후인 1960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케이스워카’로 입선하고 ‘사상계’에 ‘아이러브유’(1962), ‘외인촌입구’(1964)를 발표하며 작가 생활을 본격화했다.
‘홍재’ 통해 김수영의 영혼 핍진하게 그려
‘어떤 파리(巴理)’(1970)는 박순녀 문학세계의 절정에서 나온 역작이다. 이 소설은 낭만적으로 보이는 제목과 달리 독자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이 소설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동백림사건’을 배경으로 하는데, ‘진영’이 간첩으로 몰린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압송돼 국내로 오자 주부인 ‘나’는 시인 홍재를 찾아간다. 나와 홍재 그리고 진영은 나라 잃은 유민으로 만주 시절을 함께했던 벗이기 때문에 나는 진영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언하자고 홍재를 설득한다. 그러나 홍재는 진영이 부부는 오래전 조국을 떠난 상류계급일 뿐이라며 연대의 제의를 뿌리친다. 그런데 이 소설이 주는 긴장감은 비단 두 사람의 갈등과 대립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1967년이라는 소설의 시공간은 홍재의 영혼을 장악해버린 한국전쟁기의 반공포로수용소와 다르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 독자를 전율시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전체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기이한 광채를 띠는 홍재의 얼굴과 그의 삶을 보여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언뜻 불쾌한 존재로 다가온다. “세계 수준에 겨루기를 좋아하는 독자를 가진 시인”이지만, 증언을 거부할 만큼 몸을 사리고, 진영 부부를 특권 계급으로 몰아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재를 우정과 정의라는 인간적 가치를 외면하고 자기 안위만 추구하는 속물로 몰아세울 수 없다. 증언의 거부는 그가 “국가가 아무리 양해해 준다고 공약해도 6·25에 의용군으로 나가 조국을 저버릴 뻔했던 치명적인 과오”를 지닌 존재라는 날마다 기억하고 깨우칠 만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홍재는 김수영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박순녀는 김이석의 벗인 이중섭, 김수영과 교류하며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발표했는데, ‘어떤 파리’는 소설로 촬영한 엑스레이라고 할 만큼 자기 불신에 시달리는 김수영의 영혼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홍재는 6·25 때 의용군으로 징집됐다는 이유로 반공포로수용소에 압송됐던 김수영의 이력과 닮은 꼴의 인물이다. 파출소가 보이면 뒷길로 다녔고 차츰 나아져 파출소 앞길을 구보로 지났다던가, 술집에서 현 정부를 비판했다가 옆의 대학생이 신고할까 두려워 돈을 모조리 털어주고 도망쳤다는 일화는 김수영에 관한 것이다. 홍재가 증언을 거부한 것은 자신이 증언의 권리를 가진 자유의 주체임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홍재는 그 새벽에 악성의 주정을 부렸다. 위경련 환자처럼 방안을 데굴데굴 헤매고 자기혐오로 소리를 내어 울기도 했다. (중략) 나타나지 않는 체포의 손길을 기다리며 원죄처럼 놓여날 날이 없는 공포의식에 쫓기는 그는 그 속에서 문득 무수한 쥐 떼에 아연했다. 그놈들은, 그 하등동물 놈들은 그가 무력한 것을 알자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방자한 꼴로 그를 우롱했다. 고가(古家)가 썩어나는 것 같은 오물 냄새를 풍기는 그놈들은 그의 전신을 마구 타오르려고 했다. 그가 손을 조금 움직여도 이놈들은 그의 약점을 아는 듯 와르르, 찍찍 간담을 서늘케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중략)
“벌레다, 나는 보지도 말고 밟아죽여야 하는 더러운 벌레다!”
이 소설의 압권은 공포에 쫓기는 홍재/김수영의 불행한 의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홍재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잡혀갈 것을 두려워해 ‘나’의 집에 피신을 오는데, 형사가 찾아온 깊은 밤에 지하실에 숨어 발작적으로 운다. 작가는 냉전 권력을 인간을 함부로 위협하는 지하실의 쥐 떼에 비유하고, 추악한 권력 앞에서 벌레가 되는 자기를 혐오하는 홍재의 고독을 보여준다. 홍재의 자기혐오와 자기 불신은 한낱 망상이 아니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어느 날, 홍재와 나 그리고 나의 남편은 깊은 밤에 ‘리버럴리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도취하지만,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공포는 위험이 실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온몸의 경고장인 듯 이윽고 형사들이 들이닥친다. 인사 조처된 담임 교사를 돌려달라고 데모한 ‘나’의 열 살 아들을 깨워 배후가 누구인지를 추궁하는 형사들은 감시가 한낱 소문이나 망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성 자유, 평등한 남녀관계 전제로 인식
이 소설은 김수영의 죽음에 관한 심리적 부검처럼 읽히기도 한다.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길에서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작가는 그의 죽음이 단순히 교통사고가 아니라 냉전 권력에 의해 오래전부터 계획된 살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제기한다. 홍재/김수영은 몇 년 전 “용기가 필요되는 증인을 자청”하지만, 수치스럽게도 이렇다 할 증언을 하지 못한다. “약속의 검은 차”로 묘사된 권력 기관의 수행원들이 그를 데리러 오자, “문어가 뿜어대는 먹물처럼 그를 포위”한 것 같은 검은색과 빛으로 인해 사유와 말의 불가능성을 경험해 증언을 하지 못한 것이다. 검은색과 빛은 그가 반공포로수용소의 심문실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심문관 앞에서 자동으로 몸과 영혼이 얼어붙듯이 그는 어두운 밤길에서 환한 빛으로 달려오는 차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공안 정권이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던 1970년 6월에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발표됐다. 이처럼 대담한 작품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이자 남성 중심적인 냉전 권력 바깥의 월남 여성 작가가 남한을 구원하러 온 이방인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소설은 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지만 ‘나’는 자유를 향한 갈망을 내려놓지 않는 해방 세대 여성들의 존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나’는 자처해 남편과 함께 오라를 진 진영을 보며 “남편이 묶이어 와도 무사할 수 있는 아내가 아닌 것이 나를 떨리도록 감격케 한”다고 고백한다. 사랑 지상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자유를 평등한 남녀관계의 전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박순녀는 비판적 교양, 감시사회, 속물성 등의 주제를 통해 남한을 해부하고, 난민적 삶의 양태 속에서도 자유를 추구하는 지성적 여자들을 주로 그렸다. 냉전체제는 인간의 특성을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분리하고 위계화하는 성차별주의를 통해 남성을 전사로, 여성을 희생자로 내모는 가부장제라는 점에서 자유를 이야기하는 박순녀의 출현은 여성 문학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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