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의 덩굴식물 앞에서

2025-06-12

10여년 만의 해남 땅끝마을. 따지고 보면 모든 지면은 다 땅의 끝이다. 미끄러운 그 위에서 아슬아슬 살아가는 중이다. 다리가 많다고 안전할까. 그건 또한 아니라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만 나고, 아차 하다가 넘어지는 빌미가 된다.

외려 지상에서는 다리가 적을수록 더 튼튼하지 않은가. 다리가 하나뿐인 나무들을 보라. 제자리를 찾았고 뿌리를 얻었다. 그 어떤 방황이나 주저도 없이 근원을 향하여 공중을 걸어가는 자세.

두 개의 떡잎 같은 발바닥에 의지해 겨우 사는 것도 대단한 존재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최근의 사정은 더욱 그러하였다. 지난겨울을 이기고 여기까지 오도록 우리 공동체를 위한 정성은 실로 각별한 것이었다.

어떻게 일어서고,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가꿀 공화국인가.

이젠 불각시에 쓰러질 수도 있을 나이. 이 토말(土末)에 또 설 날이 있을까.

늦은 밤 투숙한 땅끝마을 모텔. 밤의 끝, 생의 한 둘레를 만진 듯 꿈에서 깨어나 첫 배 타러 일어나 창문을 여니 박명의 바다가 슬픈 표정으로 저만치 앉아 있다. 날카로운 햇살 아래 땅의 끝 아닌 데 어디 있겠나. 매 순간 세상의 끝과 접촉하며 산다. 오늘의 보길도행은 이 섬에만 서식하는 꿀풀과의 속단아재비를 찾는 것. 서둘러 출발해 호젓한 산길에서 마침내 그 귀한 꽃을 만났다.

흔히들 나라의 세 요소로 국민, 주권, 영토를 꼽는다. 오늘은 땅끝에 왔으니 우리 국토, 바닷가에 왔으니 덩굴성 식물을 힘껏 눈에 넣는다. 얽히고설킨 덩굴줄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있는 것 같아도 바다로 투신하려는 나무, 바위, 돌들을 말리며 어깨 겯고 에워싸서 울타리처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

예송리 해변으로 거의 다 내려와 내 키만 한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군의 식물들을 만났다. 댕댕이덩굴, 개머루, 환삼덩굴, 푼지나무, 며느리배꼽, 으름덩굴, 여우콩, 마, 가시복분자, 줄딸기, 사위질빵, 마삭줄, 인동덩굴, 송악, 남오미자 등 무려 15개나 집합한 덩굴식물. 외딴섬 보길도에서 우리 국토의 테두리를 옹위하는 것들. 그것은 지금 내 마음의 생태계와 흡족한 궁합을 이루기에 공손하게 머리 숙여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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