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환의 시대’ 맞은 국제정치

2022년 미국발 ‘챗 GPT 쇼크’에 이어 올해 초 중국발 ‘딥시크 쇼크’에 이르기까지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 몰고 온 충격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기술의 충격이라고 하면 ‘대포와 군함’으로 대변되는 구한말 서양 근대기술의 충격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시각에서 이러한 충격에 맞섰다. 일례로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이이제이(以夷制夷) 발상을 바탕으로 서양 무기기술을 받아들이려 했다. 1866년 침몰한 제너럴 셔먼호를 인양해 이를 모방한 철갑증기선을 건조했고, 프랑스 대포를 모방 제작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려고 무기가 우수한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중국의 서양 기술서인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참조해 서양식 무기를 제작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기술 발달이 촉발한 국제정치 전환, ‘디지털 국가책략’ 급부상
AI 기반 국제정치는 협력보다 경쟁, 냉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
강대국보다 AI 투자 여건 불리, 제한된 자원 효율적 활용 필수
미·중 AI 패권경쟁 사이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도 정립해야
국가책략의 결여는 참담한 결과

이러한 노력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 근대 기술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필요해 보이는 무기기술만 도입하려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대포와 군함’은 서양 근대 과학기술의 종합적인 산물로 단숨에 베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무기기술 개발과 군사적 활용을 지원한 근대 국민국가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서양 제국들은 부국강병 게임을 벌이며 세계로 팽창해 나갔고 그 위세는 한반도까지 미쳤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는 참담했다. 그야말로 시대의 전환을 헤쳐 나갈 근대적인 ‘국가책략(statecraft)’의 결여가 낳은 결과였다.
국가책략은 국가(state)를 운영하는 술(術)과 책(策), 즉 술책(craft)이다. 대내적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나가는 능력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통치술(統治術)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국가적 과제를 풀어나가는, 미시적 ‘책(策)’과 거시적 ‘략(略)’이라는 의미로 ‘책략’으로 번역했다.
국가책략의 기본은 국가 지도자가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당대의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에 있다. 자고로 국가책략은 전환의 시대적 코드를 읽어내는 ‘독시(讀時)’의 역량을 바탕으로 했다. 또한 국가책략은 미시적·거시적 정책을 구현함으로써 국가를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자강(自强)’의 역량을 의미한다.
전환의 시대적 코드 읽어내야
이런 점에서 국가책략은 단순한 통치술을 넘어 국가의 흥망성쇠를 책임지는 능력으로 통한다. 아울러 국가책략은 외세의 도전에 대응해 자국의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균세(均勢)’의 역량이자 책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책략 개념의 3대 축은 독시와 자강·균세다.
난세를 헤쳐가는 국가책략에 대한 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있었지만, 현대적 논의의 원조는 국가운영과 권력행사에 대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제시한 근대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다. 서양 근대 국민국가들이 추구한 국가책략의 요체는 부국강병을 위한 자강의 역량을 닦아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균세를 달성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동아시아에서도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화 전략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코드를 읽고 국정운영의 힘을 결집해 외세의 위협에 대응했던 국가책략의 사례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산업화와 그 이후 민주화도 시대전환의 코드를 읽고 국정 능력을 발휘한 국가책략의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AI 영향력 커지며 패러다임 변화
최근 지정학적 맥락에서 경제와 안보가 연계되면서 ‘경제적 국가책략(economic statecraft)’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더 나아가 오늘날 국가책략에서 디지털 기술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지면서 ‘디지털 국가책략’이 새로운 논제로 부상했다.
최근 각광 받는 AI는 디지털 국가책략의 핵심 대상이자 수단이고 목표다. AI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기술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쓰이는 ‘범용기술’이며 인간의 육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을 높여주는 ‘증강기술’인 데다가 경제와 산업 및 기타 사회 시스템 전반의 성장을 이끌어 가는 ‘선도기술’이다. 이러한 AI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AI 전환(AX)’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다. 그야말로 AI 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국제정치 분야에도 AI 전환은 큰 영향을 미쳐서 ‘AI 기반의 국제정치 전환’이 요즘 학계의 큰 화두다. 이러한 과정에서 AI는 미래 국가책략의 요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중견국인 한국으로서도 독시와 자강·균세의 차원에서 AI 국가책략을 고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AI 국가책략의 과제는 AI 기반 국제정치 전환의 양상을 읽어내는 ‘독시’에서 출발한다. 현재 AI 전환이 국제정치에 투사하는 코드는 협력보다는 경쟁이다. 지구화 시대의 상호의존과 호혜협력을 넘어 지정학 시대의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이 득세하고 있다. 또한 AI 전환은 강대국 질서의 재편도 예견케 한다. 오늘날 AI 기술의 군사적 활용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짜였던 냉전기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될 가능성을 예견케 한다.
더 나아가 AI의 발달로 인해 인간 이성에 기반을 둔 근대 기술 문명이 인류의 통제를 넘어서는 경계 밖으로 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AI 기반 국제정치 전환의 양상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중견국 AI 국가책략의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I 연대 외교’도 소홀히 말아야
둘째, AI 역량을 갖추는 ‘자강’도 AI 국가책략의 큰 과제다. AI 분야의 인재 양성이나 기술 개발, 인프라 조성을 위한 민간·정부 차원의 투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자강 책략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AI 자강의 게임이 ‘양질전화(量質轉化)’의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한 ‘규모(scale)의 게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규모의 게임에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미국·중국과 같은 큰 나라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우리가 가진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국가책략의 필요성이 자주 거론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단순히 기술과 인재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투자의 규모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AI 분야에서 중견국으로서 우리가 쌓아온 경험과 성과를 반영해 이른바 ‘구조적 공백(structural holes)’을 공략하는 새로운 개념의 AI 국가책략이 필요하다.
끝으로 ‘균세’가 AI 국가책략의 필수적인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AI 균세’의 제일 큰 과제는 미·중 AI 패권경쟁 사이에서 우리의 위상과 역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미국의 지배적 플랫폼에 편승하더라도 그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중국이 내세우는 대안적 플랫폼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가 고민거리다. 실제로 ‘폐쇄형’과 ‘개방형’을 내세워 진행되는 최근의 미·중 AI 혁신생태계 경쟁은 앞으로 우리에게 어려운 선택의 상황을 펼쳐놓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편 강대국 중심의 ‘단순 균세’를 넘어 국제사회의 여타 구성원들을 염두에 둔 ‘복합 균세’의 마인드도 필요하다. 글로벌 차원에서 ‘동지국가(同志國家, like-minded countries)’들과의 ‘AI 연대외교’도 추진해야 하며 중견국 시각에서 본 AI 안보담론과 윤리규범을 제시하는 ‘AI 규범 외교’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 조율 시급
요컨대 AI 전환의 시대를 헤쳐 나갈 AI 국가책략의 마련이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현재 다소 분산적으로 추진되는 AI 정책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율하는 ‘메타 거버넌스’ 체계의 구축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AI 국가책략을 총괄하는 국가 지도자의 부재 상황을 빨리 해소해야 한다. AI 전환의 시대적 코드를 정확히 읽어내고(즉 독시), 자강과 균세의 책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이를 총괄할 ‘컨트롤타워’가 바로 서야 한다.
세계 각국은 이미 앞만 보고 뛰기 시작했는데 우리만 이렇게 머뭇거리다가는 큰일 난다. 작금의 상황을 둘러보면 우리가 150여 년 전의 선조들보다 더 낫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제2의 개항기’를 맞았다는 자세로 AI 전환의 국제정치를 헤쳐 나갈 AI 국가책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