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정현 "오랜 시간을 견뎌낸 재료 자체가 작품…질감이 정신이다"

2025-11-02

조각가 정현(69)은 "오래된 것들의 형태와 질감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철로의 폐침목과 녹슨 철조망, 목전주까지도 작품의 재료로 썼다. "오랜 시간을 견딘 돌과 나무, 철 등의 재료 자체에 시간과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으로 깊은 우물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리듯이 그 안에 잠자고 있던 형상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을 해왔다.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정현의 개인전 '그의 겹쳐진 시간들'(12월 13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1991년부터 2025년에 걸쳐 제작된 조각과 드로잉 총 84점을 펼쳐 놓았다. 작가가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 놓은 것처럼 전시장은 그가 다양한 재료를 탐구하며 제작한 다양한 인체의 형상과 두상 조각, 드로잉으로 가득 채워졌다.

1990년대 초 그는 삽이나 각목 등을 도구로 흙의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현 기법으로 브론즈 인물 조각을 선보였다. 그 후 그의 관심은 사람에서 점차 소재나 사물 등으로 넓혀져 침목과 철근, 숯 등 재료를 통해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제작된 두상, 입상과 더불어 작가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 올해 제작한 두상도 두 점 공개한다.

높이 50㎝ 안팎의 작품들은 무심하게 깎아 놓은 '덩어리' 같다. 얼굴, 표정, 자세 등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거의 없지만 절묘하게도 모두 사람의 형상이다. 작가가 흙을 붙이고 깎고 붙이고 또 붙이며 표현한 자신의 "감정들"이다. 뭉툭한가 하면, 예리하게 깎여 있고, 긁히고, 울퉁불퉁한 질감의 '덩어리'들은 독특한 울림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절로 여미고 두 손을 모으게 한다. "전엔 사실적인 작업도 했다"고 말하는 정씨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이면의 것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 걸맞은 도구를 찾으며 작업할수록 사실적인 묘사에서 멀어졌다"고 말했다. 표현을 아낄수록 더 많은 감정을 전하게 됐다는 얘기다.

"질감이 정신이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면 오래된 돌이나 고목을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흙으로 형상을 만들고 석고를 뜬 뒤 브론즈로 완성한 것들이다. 신작으로 공개한 두상은 두 점은 브론즈 표면을 석고로 채색했다. 정씨는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질감이다. 질감이 곧 정신이라고 생각한다"며 "흙을 던지고 깎으며 형상을 만들고 석고를 떴을 때 그 질감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람들이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은 붓의 터치에서 전해지는 감정의 힘 때문"이라며 "터치와 질감에 감정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드로잉에서도 붓과 재료의 거친 질감이 두드러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감 대신에 콜타르에 희석제를 섞어 막붓 같은 것으로 그렸다"는 그는 "천과 나뭇가지, 빗자루 등의 재료로 붓을 많이 만들어 쓴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붓으로는 제 그림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수표교'의 한국적 미감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야외 정원에 설치된 대형 조각 '무제'(2025)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돌다리인 수표교(水標橋)의 교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수표교는 조선 1420년(세종 2년) 현재의 청계천에 세워진 다리다. 처음엔 나무로 제작됐다가 1422년 화강암 돌다리로 교체됐고,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정씨는 "수표교의 진짜 아름다움은 하단 교각에 있다"고 "무심하게 다듬은 듯한 돌의 형태와 오랜 세월을 견뎌낸 표면이야말로 한국적 미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수표교에서 받은 감동은 작업으로 이어졌다. 주로 아날로그 연장으로 작업해온 그가 이번엔 3D 스캐너로 석조 교각을 샅샅이 측정해 데이터를 얻고 작품에 녹였다. 시간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형태와 질감을 아래를 받친 큰 덩어리 조각에 담았고, 위의 큰 덩어리에는 수표교에서 얻은 데이터를 늘려 얻은 물결무늬를 새겼다. 수표교에서 그가 발견한 '시간의 힘'과 '견딤의 미학'은 별관에 전시된 수표교 교각의 축소 모형에 담겼다. 이 공간엔 2019년 고성 산불 당시 타버린 나무로 제작한 숯 조각도 함께 놓였다.

1956년 인천에서 태어난 정씨는 홍익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어 프랑스 파리국립고등미술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92년 원화랑에서 연 첫 개인전 이후 꾸준히 전시를 열어왔고, 김복진미술상(2024), 김세중조각상(2014),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6) 등을 수상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다 지난해 그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것을 계기로 새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해 9~11월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 목전주(2006)가 전시되며 크게 주목 받았고, 12월 아트바젤 마이애미 '서베이' 섹터에서 1990년대에 제작한 조각과 드로잉을 개인전 형식으로 선보여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그의 작업은 리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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