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는 참으로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댄스다.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에서 맹인 퇴역장교 역의 알 파치노와 아름다운 여성이 탱고 음악 ‘Por Una Cabeza’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은 나이를 불문하고 관객을 설레게 한다. 탱고는 하나의 심장, 네 개의 다리로 추는 춤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호흡이 중요하다. 그런데 탱고를 한참 격렬하게 추다가 갑자기 파트너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전까지 한껏 긴장을 고조시키던 음악도 갑자기 끊겨버린다. 돌아서는 파트너가 아쉽고 서운하지만 탱고는 멈춰야 한다. 탱고는 파트너 없이 혼자서는 출 수 없다.
트럼프, 우크라 전쟁 종식 공언
침략자 응징대신 보상 주는 행위
힘없는 우크라 주권 유지가 중요
패전 보다는 일단 후퇴가 현명
올해 10월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과 더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하자, 도널드 트럼프는 탱고이야기로 응수했다. “탱고도 파트너가 있어야 추는 거 아시잖아요” 이제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을 것이라고 비수를 날린 것이다. 자신과 더 이상 탱고를 추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거절에 젤렌스키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트럼프의 귀환은 우크라이나에겐 재앙이다. 그의 발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트럼프는 민주주의 수호와 같은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미국 국익을 최우선에 두는 현실주의자일 뿐이다. 2019년 우크라이나 관련 스캔들로 미 하원에서 탄핵된 바 있는 트럼프는 푸틴과 가깝다. 반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전에 러시아와 타협하지 못한 젤렌스키의 책임이라 했다. 자신이 집권하면 바로 종전시키겠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종전에 반대하면 무기지원을 끊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국전쟁 중에 새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이 종전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한국 정부에 대해 북한이 점령한 강원도를 포기하라고 하고, 말 안 들으면 미군을 철수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미국의 변화에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 젤렌스키는 최근 서방의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 영토의 완전수복을 목표로 하는 ‘승리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20년간 미 외교협회 회장을 역임한 리차드 하스는 ‘우크라이나는 완벽하고자 해서는 안된다(The Perfect has become the Enemy of the Good in Ukraine)’라는 글을 유력 외교평론지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했다. 내가 하스의 글을 주목하는 것은 그의 뛰어난 통찰력 때문이다. 베테랑 외교관 출신 학자인 그의 글에 담긴 현실적 제안은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변화를 예고하곤 했다.
하스는 젤렌스키의 승리계획대로 영토수복이 되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러시아에 비해 병력과 무기부족, 산업기반 열세 등을 감안할 때 실행 불가능한 일이라며 종전을 제안한다. 1단계에서는 현 전선에 따라 휴전하고, 양국을 분리시킬 완충지대를 설정한다. 2단계는 핵심현안인 러-우 간의 영토교환, 크림과 우크라이나 돈바스 주민들의 자치문제,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나토가입 등) 문제 등을 논의한다. 2단계는 푸틴 이후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패전하거나 승산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일단 종전하고 우크라이나는 주권과 독립을 보전하면서 국가재건을 시작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와 하스의 종전방안은 침략국에게 징벌대신 보상을 주는 것으로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세상의 독재자들에게 나쁜 선례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 우크라이나에게는 탱고를 함께 출 파트너가 없다는 엄중한 현실이다. 미 상·하원도 공화당 지배하에 들어가 트럼프를 견제할 세력도 없다. 유럽의 지원만으로 전황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것도 언제까지 갈지 불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계속하기 보다는 차라리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전술적 후퇴가 낫다.
한국전쟁 중에 영국의 더 타임즈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한국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했다.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자연자원과 훌륭한 인적자원은 한국처럼 기적을 만들 수 있다. 조국을 지키려는 불타는 의지를 가진 우크라이나 국민이라면 가능하다. 최고의 복수는 러시아 국민이 부러워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세상에는 우크라이나와 탱고를 추고 싶어 하는 파트너들이 줄 서있을 것이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