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정부에 이어 다시 한번 확대 재정의 시대가 열렸다. 이번에는 더 화끈할 전망이다. 이재명표 확대 재정은 경제 살리기의 마중물이 될까 아니면 퍼주기식 포퓰리즘이 될까.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확인해 보자.
첫째, 재정준칙 입법 여부다. 필요하면 돈을 써야 하지만 무턱대고 쓸 수는 없다. 그러니 작년 대비 몇 퍼센트 이상은 한꺼번에 지출을 늘리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놓는 것이 재정준칙이다. OECD 국가 중에 한국과 튀르키예에만 없다. 이미 여러 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민주당의 반대로 무산됐었다. 돈을 풀어서 정치적 지지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국민경제를 위한 것이라면 다른 모든 선진국처럼 재정준칙을 도입해서 국민 세금이 무한정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확대 재정을 원한다면 줄줄 새는 뒷문부터 틀어막아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재정준칙 도입해 세금 낭비 막고
보편증세로 재정 지속성 확보를
세금으로 진통제 놓기만 해서야
지속적 자영업 구조조정도 필요
둘째, 국민이면 누구나 많든 적든 세금을 낸다는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에 입각해 왜곡된 세금구조를 정의롭고 지속 가능하게 바로잡는 시도를 할 것이냐다. 전체 세수에서 각종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OECD 평균과 비교하면 한국은 법인세와 재산세가 지나치게 높고 소득세와 부가가치세가 지나치게 낮은 상태가 지속되어왔다. 조세정책을 정상적으로 운용하지 않고 소수의 부자에게 고액의 세율을 적용하고 서민은 봐준다는 식의 정치적 운용을 해온 결과다. 소수의 부자에게 징벌적으로 과세하려니 그들은 나쁜 사람이어야만 한다. 걸핏하면 상위 몇 퍼센트를 들먹이는 이유다. 사실은 한국의 경제적 상층은 세계 최고율의 소득세·재산세·상속세를 내고 있고, 벌어들인 것보다 훨씬 많이 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잘못도 없이 비난만 받으니 드디어 부자들은 한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작년에 백만장자 순유출 규모가 세계 4위라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이 떠나면 투자도 일자리도 함께 떠난다. 재정 확대도 좋지만,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자감세’ 타령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세수가 부족한 것은 오랫동안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책임을 왜 잘못도 없는 특정 계층에게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은 빠져나가나.
세금구조를 정상화하고 모든 시민이 자신이 가진 시민권에 상응하는 세금을 내는 보편증세로 가야 한다. 마침 보편증세는 과거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증세 없는 복지국가는 허구”라는 연설과 ‘명연설’이라는 민주당의 맞장구에서 보았듯이 보수·진보 사이에 합의가 있는 의제다. 그때그때 정권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말을 바꾸고 있을 뿐이다. 보편증세로 가야 조세의 정의가 구현되고, 초고령사회에서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확보된다. 조세 구조 개선 없이 부자 감세 운운하며 돈 쓰는 데만 열중한다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30년 전 공제기준을 전혀 손보지 않은 끝에 배우자가 죽으면 세금 낼 돈 없어서 집 팔고 떠나야 하는 상속세법 개정조차 흐지부지된 것을 보면 불안해 보인다.
셋째, 재정 확대로 혜택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준칙이 제대로 작동하느냐이다. 정부가 현금이나 다름없는 각종 지원을 풀면서 흔히 하는 얘기가 골목 상권이 살아나고 자영업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영업 부문은 OECD에서 두 번째로 클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팽창돼 있다. 누구나 퇴직하면 치킨집을 열고, 치킨집의 도산율이 벤처기업 도산율보다 높은 레드오션이다. 이대로라면 자영업 부문에서 누군가는 계속해서 망할 수밖에 없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데 무슨 수로 살아남겠나.
당장 상황이 시급해서 돈을 풀 수밖에 없다는 말이 진정성이 있으려면 그와 동시에 자영업 구조조정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영업 규모를 줄이고 더 생산적인 다른 부문으로 이동할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그대로 둔 채 시급하니 돈 풀자는 말은 환자 치료에는 관심 없고 세금으로 진통제만 계속 놓자는 의사랑 다를 바 없다. 남이 낸 세금으로 나눠주고 인기 얻자는 정책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최근 배드뱅크를 통한 장기연체채무 탕감을 놓고 한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심각하다. 세금으로 채무를 탕감하면 모럴 해저드에 대한 우려나 기존에 성실하게 채무를 상환한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갚을 능력이 있는데 탕감해줄지 모르니 신용불량으로 7년 살아보겠나”라며 비판을 틀어막아 버렸다. 논리를 교묘하게 비틀어 핵심 쟁점을 빠져나가는 특유의 화법이다. 우리 주변의 개인들 한 사람씩 놓고 보면 그러지 않겠지만, 국민 전체를 놓고 보면 빚 안 갚고 버티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상당수 나온다. 준칙 없이 혜택만 늘린다면 그게 바로 세금으로 표를 사는 정치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