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종교개혁,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하여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2025-11-17

◆종교개혁, 가로막힌 길을 열다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한 젊은 수도사이자 교수가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았다. 학술 토론을 제안하는 평범한 대학의 관행이었지만, 이 작은 행동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큰 울림이 되었다. 루터가 본 것은 가난한 농민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마지막 동전까지 털어내는 현실이었다.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설교가 횡행하던 시절,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인가?”

종교개혁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었다. 신자가 하늘부모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을 회복하는 영적 혁명이었다. 중세 신령한 여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 그 길이 이제 모든 이에게 열린 것이다.

1520년은 기독교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루터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워놓은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첫 번째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만인사제설’을 선언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성직자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천 년 넘게 이어진 성직자 계급의 독점이 무너졌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7성사 제도를 비판했다. “성사는 은혜의 통로지만, 교회가 그것을 통제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 신도들을 영적으로 구속하고 있었다. 성사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는 신도들을 교회 제도에 속박하는 사슬이었다.

세 번째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명확히 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다.” 선행과 공로가 구원에 필수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 뒤집혔다.

루터의 3대 원리는 분명했다.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교회와 성직자라는 중개자 없이 하늘부모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을 여는 혁명이었다.

박해와 분립, 더 순수한 교회를 세우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철회 요구 앞에서도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추방당했지만, 이 박해는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과 분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박해는 신앙을 정화하고, 고난은 더 높은 기준을 세운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순수성을 지켰듯, 개신교도 이런 과정을 거쳐 더 깊은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조직 분열이 아니라 시대적 신앙 정체성이 분별되는 과정이었다. 세속적 흐름과 경건한 흐름이 갈라지며,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길이 열리고 있었다.

400년의 대칭, 섭리가 그리는 나선형 구조

《원리강론》은 섭리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반복과 상승의 나선형 구조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실제 역사는 이 패턴을 드러낸다.

예수님 강림 400년 전, 세계는 두 문화적 흐름으로 분립되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확산된 헬레니즘은 인간과 이성을 중심에 둔 가인형 세계를 형성했고, 철학과 과학이 발전했다. 반면 말라기 선지자의 개혁으로 정립된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의 아벨형 세계를 이루며 신앙의 본질을 회복했다. 가인형 헬레니즘이 로마제국의 발전으로 이어져 공통 헬라어, 사통팔달한 도로망, 통일된 법과 제도를 통해 복음 전파를 위한 외적 환경을 조성했고, 아벨형 헤브라이즘이 메시아를 맞이할 내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분립섭리를 통해 독생자를 맞을 세계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독생녀 탄생 400년 전에도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었다. 문예부흥은 인본주의 세계관을 부활시켰고, 종교개혁은 신본주의 신앙을 회복했다.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점차 성숙해가면서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열었다. 칼뱅은 1543년 《기독교강요》 3판을 완성하고,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독생녀 탄생(1943년)과 정확히 400년 차이다. 이 놀라운 동시성은 섭리가 일관된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부의 단장, 3단계의 준비

종교개혁은 단번에 완성된 사건이 아니다. 하늘부모님은 400년에 걸쳐 세 차례 개혁의 물결을 일으키셨다. 16세기 루터와 칼뱅의 개혁은 성서를 중심으로 신앙의 기초를 세운 진리의 회복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개신교도들이 형식주의에 빠지자, 17~18세기 슈페너와 웨슬리를 통해 영성의 회복이 일어났다. 이어 19세기까지 미국 전역을 휩쓴 대각성운동은 성령의 은사와 재림 신앙을 회복하는 실천의 회복이었다.

진리, 영성, 실천의 3단계는 마치 혼인을 앞둔 신부가 준비를 갖추어 가는 과정과 같다. 하늘부모님은 이 긴 여정을 통해 신부된 교회를 찾아 세우셨으며, 마침내 독생녀를 맞이할 영적 기반을 완성하셨다.

동방으로 향하는 신부 영성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400년의 여정은 모두 서방에서 동방으로 향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개혁은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넜다.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대각성운동의 물결은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도달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서구 기독교 2천년의 신부 영성이 동방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성과 만나는 하늘부모님의 섭리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시작으로 한국 교회는 서구와는 다른 독특한 영성을 드러냈다. 성령의 체험과 회개의 눈물, 그리고 메시아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종교개혁 400년의 대장정은 독생녀 탄생으로 완성되었다. 서구의 신부 영성이 동방의 한민족과 만나 1943년 한반도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단순한 서구 교회의 개혁 운동이 아니라,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세계사적 준비과정이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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