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깐부의 시대, 깐부의 정치

2025-11-02

자동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도 꽤 넓어 보였던 어린 시절, 아이들이 ‘깐부’가 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오른손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네 개를 이용해 서로 맞잡은 후 남은 엄지손가락을 아래위로 포개면 깐부를 위한 ‘의식’이 끝나고 동맹이 시작된다.

깐부를 얻은 아이들은 든든했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 능한 깐부에게 그 비상한 재주를 전수받을 수 있었고 풍족한 그에게 구슬이나 딱지를 빌려올 수도 있었다. 오징어 게임 시즌1의 오일남 역시 이렇게 말한다. “깐부끼리는 니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이 깐부가 될 수는 없었다. 예닐곱 살의 꼬마들도 누구와 깐부를 먹어야 본인에게 득이 되는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는지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다. 결국 재량이 떨어지거나 재원이 부족한 아이들은 그 골목의 동맹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승부의 세계, 그곳의 비정함을 깐부를 통해 일찌감치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궁금하던 차에 깐부의 어원이 뭔지 찾아보니 미국에서 소규모 밴드를 부르는 ‘cambo’에서 시작됐다는 얘기도 있고 관포지교의 관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국립국어원도 어원을 모른다고 하니 정설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지난주 깐부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나 ‘치맥’ 회동을 한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도 뭔가 의미를 담겠다 싶었다. 세 사람은 지난달 30일 서울 삼성동의 깐부치킨에서 치킨과 함께 소맥을 마셨고, 이튿날 엔비디아는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클라우드 등 4개 기업에 총 26만 장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최대 14조 원 규모에 달하는 한국 인프라·기술 발전 인공지능(AI) 이니셔티브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깐부치킨 회동은 ‘AI 동맹’의 티저였던 셈이다.

같은 기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 21개국 정상들이 경주에 모여 상호 협력을 모색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개회사처럼 “국제질서의 변곡점 위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협력과 연대”를 고민한 것. 국익에 도움이 될 깐부를 맺기 위해 진지한 탐색전을 펼친 것이다. 한미와 미중 간의 팽팽했던 관세 협상도 타결됐다. 이후에 펼쳐질 여정이 녹록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또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며 일단 실리를 챙겼다.

물론 그 골목길 아이들의 깐부가 그랬던 것처럼 국제사회에서의 깐부가 영원할 수는 없다. 엔비디아와의 동맹이 굳건히 유지되려면 대한민국이 AI 리딩 국가로 거듭나야 하고 미국·중국 등과의 통상이 순조롭게 풀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존재가 돼야 한다. 깐부를 맺는 주체들은 그렇게 자신을 성장시켜 파트너를 선택하고 동맹을 맺어 해법을 함께 찾으며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그것이 냉혹한 세계 질서 속에서의 생존 방식이다.

10월의 마지막 날 점심 식사를 함께한 원로 정치인은 “10여 년 전만 해도 여야 상임위원회 간사들이 함께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것이 가장 가성비 좋은 정치였다”고 말했다. 그는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며 많은 대화를 하다 보면 막혔던 현안들이 금세 풀리고는 했다”고 덧붙였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점을 모색하는 전략적 ‘깐부의 정치’가 그 시절에는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런 정치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점점 의심하게 된다. 권력에 취한 거대 여당은 말 그대로 안하무인 정치를 하고 있고 강성 팬덤에 의지한 야당은 지리멸렬의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고함과 욕설이 무한 반복되는 보여주기식 싸움을 되풀이할 뿐이다.

골목길의 아이들은 누군가 먼저 자신을 깐부로 청해주기를 기대하며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연마했다. 그것이 엄마를 졸라 더 많은 구슬과 딱지를 확보하는 것보다 수월했기 때문이다. 어떤 무대에서든 자신이 동맹에 꼭 필요한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인데, 지난 며칠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AI 깐부’를 통해 정치인들이 뭔가 느낀 바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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