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흘 전쯤, 아침나절에 옆지기가 애호박을 따다 달라고 해서 뒤란으로 돌아갔다. 호박 줄기는 뒤란의 돌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호박잎들 사이를 뒤져 작은 애호박 하나를 찾아냈다. 애호박을 딴 후 돌아서는데, 무성하게 자라는 여름풀들 가운데 우뚝 자란 왕고들빼기가 보였다. 왕고들빼기는 옆지기가 아주 좋아하는 쌈채소. 그래서 왕고들빼기 잎을 뜯으려고 다가서는데, 내 키만큼 자란 왕고들빼기 줄기와 잎들 위에 색다른 형상이 눈에 띄었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뱀 한 마리가 칭칭 똬리를 틀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푸른 빛이 도는 몸에 붉은 무늬가 섞인 유혈목이. 보통 꽃뱀(花蛇)이라 불리는데 1m쯤은 돼 보였다. 젖은 몸을 말리려고 왕고들빼기 잎 위에 똬리를 틀고 햇볕을 쬐고 있었던 것이다.
꽃뱀 해치우려다 생각 달라져
인간도 ‘생명의 그물망’의 일부
대자연 두려워하고 공경해야

나는 곧 헛간으로 가서 삽을 찾아들고 다시 뒤란으로 갔다. 아내가 워낙 뱀을 보면 기겁을 하곤 해서 뱀을 해치울 셈이었다. 삽을 들고 살금살금 뱀이 똬리를 튼 왕고들빼기에 다가섰는데, 문득 내가 해치우려던 꽃뱀이 왕고들빼기의 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뱀을 잡으려고 들고 간 삽을 내려놓았다. 꽃뱀을 바라보는 내 눈이, 꽃뱀의 눈에 비친 내가 잠깐 사이에 달라진 것일까.
그날의 경험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만물과의 공생이 요즘 내 삶의 화두인데, 왕고들빼기와 꽃뱀이 둘이 아닌 하나로 다가오던 그 아름다운 풍광이 생명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본래 우리 집 정원엔 개구리가 많으니 뱀도 자주 꼬여 든다. 그날 이후에도 뱀 몇 마리를 더 보았지만, 못 본 척 내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오, 그래. 뱀처럼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생명들도 다 지구에 필요해서 조물주가 만드셨으리라. 생태 영성의 눈이 트이면 만물이 새롭게 보인다. 영성이란 나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주 만물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신령한 품성이 아니던가.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하느님과 자연은 똑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두 단어”라고 말했다. 위대한 신비가들과 시인들도 항상 세계를 살아 있는 통일체로서 자신들의 영혼과 똑같은 영혼을 지녔다고 보았다.
아메리카 인디언 시애틀 추장은 이것을 생명의 위대한 그물망이라고 불렀다. 생명의 그물망은 인간이 짠 것이 아니며, 인간은 그저 그물망 속의 한 가닥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물망의 한 가닥일 뿐인 인간들이 오만에 젖어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있다고.
몇 년 전 전 세계를 덮쳤던 코로나19가 다시 동남아 여러 나라에 번지고 있어 우리나라 보건 당국도 긴장하고 있다.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당시 코로나로 고통받으면서 우리는 대자연과의 공존공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었다.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100여년 전만 해도 인간이 지구에서 차지한 땅은 14%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인간은 지구의 7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따라서 인간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생명체들이 인간 세상 속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는 박쥐나 천산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동물들의 터전마저 인간이 차지함으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생명체들이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와 공격하게 된 것.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전염병이나 환경 재앙은 우리 인간이 저지른 업보 때문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조차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경외는 단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도 포함된다. 오늘날 숱한 환경 재앙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자연을 훼손하고 산과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은 공경하는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유대 사상가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헛된 자만심으로 인해 당신이 우러러보는 능력을 위축시키는 때, 우주는 당신 앞에 하나의 장터가 되고 만다”고 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우주가 시끄러운 장터처럼 변한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꾼다면, 하늘을 우러르며 경외를 으뜸으로 여기는 하늘 정원사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리.
고진하 목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