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해 빠르게 항복을 받아내려 했던 러시아의 ‘현대식’ 속전속결 전략은 1차 대전 당시 프랑스를 6주 만에 굴복시키겠다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처럼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로 러·우 전쟁 역시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장기화되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지 1년 반이 지난 1916년, 특히 독일은 장기화된 전쟁의 전환점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연합군의 주축인 영국은 서부 전선에 100만명의 대규모 육군을 투입하는 동시에, 유럽 밖 해양을 장악한 강력한 해군을 이용해 독일을 경제·물자 측면에서 봉쇄하는 소모 전략을 펼쳤다. 이에 독일은 점차 목이 조여 오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그나마 군사력이 남아 있던 이 시기 결정적 전투를 시도하여 전쟁을 조속히 종결짓길 원했다.
독일은 연합군의 ‘진짜 힘’은 영국에 있다고 보았지만, 막강한 해군을 보유한 영국을 직접 타격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대신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주력, 즉 ‘영국의 검’ 역할을 하는 프랑스를 굴복시키면 영국도 혼자서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 독일 총참모장 팔켄하인은 프랑스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상징적 요충지를 공격해, 사수하러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강력한 화력으로 소모시키겠다는 전략을 구상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군은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통하던 베르됭 요새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애초 프랑스군을 압도적 소모시키려던 독일의 구상과 달리, 독일군 역시 막대한 희생을 피할 수 없었고 전투가 10개월이나 이어지면서 양측 모두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에 빠졌다. 이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당초 프랑스군이 주도하려 했던 솜 공세를 영국군 위주로 강행했다. 역사상 최초로 전차까지 투입했지만, 이 역시 이렇다 할 전과는 없었다.
베르됭과 솜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무려 200만명에 달하는 참혹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전쟁 종결의 결정적 돌파구는 마련되지 못했다. 전쟁은 그 뒤로도 2년이나 더 이어졌다.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처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미 개전 초기에 속전속결의 기회를 놓친 뒤, 양측은 어느 쪽도 치명적 일격을 가할 만한 결정적 전투를 벌이지 못한 채 교착된 전선에서 소모적 충돌만 반복하고 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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