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한문해

2024-10-17

기획취재: 잊힌 현대사, 시베리아 억류의 기억과 기록

1. 강제동원 피해자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

2. “교사도 징병” 관동군에 끌려간 울산 사람 이규철

3. 철모도 소총도 없이 전쟁터로, 전차 격파 자폭 훈련

4. 기아, 혹한, 중노동…셀레트칸과 오렌부르크의 노예

5. 험악한 귀향길, 시베리아 억류자 피해보상과 과제

6. 러시아 공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한문해

지난 3월 기획취재를 준비하며 만난 배성동 작가가 휴대폰에 저장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배성동 작가는 한반도에서 멸종된 호랑이와 조선범과 함께 간도와 연해주로 쫓겨간 항일 의병의 행적을 좇아 10여 년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시호테알린산맥과 비킨강, 하바롭스크, 시베리아, 바이칼호 일대를 답사해왔다. 그 결과물로 2021년 <반구대 범 내려온다>(민속원)를 출간하고 후속편인 <조선범 망명 보고서>를 집필하고 있다. 배성동 작가가 보여준 사진은 러시아어로 쓰인 오래된 문서였다. 1885년생 고려인 한문해(한 니콜라이)가 1931년 소련 공산당 입당 설문지에 자기 신상을 기록한 자술서였다.

[울산저널]이종호 기자= 문서에는 한문해가 연해주 수찬(水淸, 현 파르티잔스크) 지역 한창걸 유격대에서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복무한 기록이 나온다. 해외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중에서 지도자급 인사들의 행적은 대부분 밝혀졌지만 무명 독립군의 기록을 발굴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다. 야쿠츠크자치소비에트 문서보관서에 잠들어 있던 이 문서를 찾아낸 이는 한문해의 외손녀 한 타티아나다. 그녀는 2020년 외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내 지난해 배성동 작가에게 건네줬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직전인 2019년 연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 교민이 “호랑이 추적하면서 미발굴 독립군도 함께 챙겨보라”며 한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배 작가에게 들려줬다. 시베리아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시에 사는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영사관을 몇 차례 방문해 자신의 러시아 성씨인 칸(Khan)을 한국식 한(Han)으로 바꿔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며 자기 뿌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독립군 후손이었다.

배성동 작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면전으로 입출국이 까다로워진 2023년 1월 러시아로 들어가 야쿠츠크시에서 한 타티아나를 만났다. 직접 만난 타티아나의 집념은 눈물겨웠다. 그녀는 외조부 한문해가 살았던 사하공화국 뉴르바를 비롯해 여러 문서보관서를 찾아다녔다. 한국을 방문해 청주한씨 고택도 찾아갔다. 그녀가 야쿠츠크 문서보관서에서 외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낸 건 2020년. 뿌리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20년간 노력한 결실이었다.

배성동 작가는 타티아나에게 받은 8쪽 분량의 문서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공증번역기관에 맡겨 번역했다. 번역한 문서에 따르면 188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한문해는 1911년 고향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낯선 이국 도시에서 3년간 짐꾼 일을 하던 그는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동쪽 산악지대인 수찬 지역의 농촌 마을로 들어가 노동자로 일하다 1920년 한창걸 유격부대에 들어갔다. 유격대에서 3년간 복무한 그는 1923년 유격대가 해산하자 파르티잔스크 동북쪽 올긴스키로 옮겨 1929년까지 양치기와 노동자로 일했다. 1929년 한문해는 올긴스키를 떠나 시베리아 북부 사하공화국 알단으로 갔다. 그곳 네자메트니 광산과 베르흐 스탈린스크 광산에서 함지질꾼과 운광공으로 1931년까지 일했다. 문서에 나온 한문해의 행적은 여기까지다.

연해주 수찬 산악지대 한인 마을

2011년 ‘한인의 극동 이주와 한인 마을의 형성: 수청(水淸) 지역을 중심으로’(러시아지역 해외한인연구Ⅱ)를 쓴 반병률 교수(외국어대)에 따르면 한문해가 한창걸 유격대에 들어가기 전 6년 동안 일했던 수찬 지역은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산악지대로 한인 거주민 중 빈농과 고용 농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들이 사는 원호촌보다 국적을 갖지 못한 여호촌이 훨씬 많았고 고려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유난히 심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 최초의 한인 마을은 1868년 형성된 신영거우(新英溝, 新英洞)로 러시아어로는 니콜라예프카라고 불렀다. 수찬 지역 한인 가구는 1909년 약 3000호에 이르렀고 1914년이 되면 인구가 약 2만1500명으로 급증한다. 반병률 교수는 “1908년 국내로 진공했던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이 주도했던 연해주 의병조직 동의회(同義會)의 열성적 핵심 간부들이 수찬 지역에서 나왔고 군자금도 수찬 지역 한인들의 모금이 큰 몫을 차지했다”며 “안중근, 엄인섭, 김기룡 세 의형제를 주축으로 한 이른바 ‘87형제’파의 주축은 수찬 지방 거주 청년들이었다”고 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와 그 후신인 국민회의 지방조직들도 수찬 지역에 설립됐다. 국민회의 지방조직들은 러시아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은 권업회의 지방총회로 흡수되는데 큰영(大營, 블라지르-알렉산드로브스코예)지방총회의 서기가 한창걸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권업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연해주 지역 항일 민족운동은 철혈단 등 비합법 비밀결사가 이끌었다. 러시아혁명 후 1918년 4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대한 한창걸이 주도해 니콜라예프카(신영거우)에서 노농병소비에트를 결성했지만 두 달 뒤 해산됐다. 1918년 6월 귀국하던 체코군이 봉기를 일으켜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고 수찬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해 10월에는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수찬 지역 빨치산 한창걸 부대

1919년 2월 수찬 지역 두 원호촌 신영거우와 다우지미(大烏吉密)에서 한창걸을 대장으로 유격부대가 조직됐다. 부대원은 35명이었다. 한창걸 부대는 그해 5월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함께 페레치노(쇠완재)에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 백군 150여 명을 살상했다. 카잔카(새제련)에서도 미연합군 토벌대와 교전해 150여 명의 사망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

한창걸은 1919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이다 체코군 사령관이 주도한 봉기에 참여했다 백군에 체포됐다. 1920년 1월 적군이 연해주를 점령하면서 석방된 한창걸은 300명 규모의 부대를 다시 조직하고 2월 쉬코토바(치머우)에서 일류호프 연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다. 한문해가 한창걸 부대에 입대한 시기는 이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문해는 진술서에 카펠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부대와의 전투에 1회 참가했다고 적었다.

1920년 4월 일본은 러시아 빨치산이 일본군을 학살한 니항(尼港)사변을 구실로 연해주에 다시 출병해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130명의 한인이 체포되고 최재형 등 지도자들이 처형됐다. 한창걸 부대는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연합해 그해 5월 다우지미 마을을 침입한 중국 마적단 훙후즈(紅鬍賊) 360여 명을 몰살했다. 마적들의 침입에 대비한 상설 조직으로 창해소년단(滄海少年團)이 결성됐는데 한창걸은 신영거우 구역 지휘관을 맡았다.

일본군과 백군의 공격을 피해 수찬 수주허로 집결한 한인 부대들은 수주허 홍두거우에서 고려노농군회를 조직했다. 한창걸은 군무로 임명됐다. 1921년 4월 고려노농군회는 혈성단과 통합해 연해주한인총회를 결성했다. 한창걸은 외교부장으로 활동했다. 한인 부대들은 트레치푸진에 6개월 속성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김경천을 사령관으로 하는 수찬 한인 빨치산 부대로 통합됐다.

1921년 가을 일본군이 올가항으로 침입했다. 수찬 한인 빨치산 부대 신용걸 중대는 11월 16일 치열한 전투 끝에 올가항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신용걸 중대장을 포함해 22명의 한인 빨치산이 전사했다. 백군과 일본군은 90명이 사망했고, 120여 명이 부상당했다.

김경천은 1921년 11월 군대를 이끌고 이동하다 일본군과 백군에 공격당했다. 부대는 흩어졌고 김경천은 적은 병력으로 이만(현 달레네첸스크)으로 가서 싸웠다. 그해 말 수주허에서 한창걸을 사령관으로, 박경철을 참모장으로 수찬 지역 한인 빨치산 부대를 재편성했다. 한창걸 부대는 일본군의 사주를 받아 침입한 훙후즈를 방어하면서 훈련을 이어갔다.

1922년 4월 초 연해주 군사소비에트 사령부는 한창걸 부대에 올가를 점령한 카벨네프 백군을 몰아내라는 특별 전투명령을 내렸다.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합류해 올가항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페름 마을에 도착한 한창걸 부대는 백군 부대를 포위 공격해 페름을 함락시키고 이튿날 새벽 올가항을 포위 공격했다. 전투는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에 걸쳐 계속됐다. 7월 말 백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기선을 타고 올가항을 떠났다.

1922년 9월 아누치노에서 김규식, 최호림, 안동백, 스탄코프, 한창걸 등 5명으로 구성된 연해주고려인의병대 혁명군사의회 임원회의가 열려 2개 본대와 3개 지대로 구성된 고려혁명군이 편성됐다. 10월 고려혁명군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함께 백군에 대한 총공격을 가해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스파스크를 점령하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한창걸 부대가 포함된 고려혁명군 수찬 지역 빨치산 부대는 아누치노를 경유해 수찬 이바노프카(이포동령)에 주둔한 500여 명의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바노프카를 점령한 한창걸 부대는 라즈돌노예까지 백군을 추격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스파스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를 거쳐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했다. 일본군이 철병하면서 5년에 걸친 러시아 내전이 마침내 끝났다.

1922년 11월 연해주 고려혁명군과 한인 빨치산 부대 군사혁명소비에트의 해산을 명하는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의 명령 799호가 내려졌다. 내전이 끝나고 연해주에 남은 한인 빨치산들은 러시아 정규군으로 편입되거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 현장에 뛰어드는 길을 택했다. 한창걸은 빨치산 부대를 해산한 뒤 ‘붉은 별’ 협동농장을 건설하고 하바롭스크 인근 바로비잔 유대인 자치주에서 내무부장을 지냈다. 그러나 김단야, 조명희 등 다른 한인 혁명가들처럼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반혁명 인사로 체포돼 이듬해 2월 하바롭스크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1958년 7월 러시아 극동군관구 재판소에서 복권됐고, 200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시베리아 북부 야쿠티아 오지로

1937년 강제 이주 피한 한문해

빨치산 부대 해산 뒤 올긴스키에서 1929년까지 양치기와 노동자로 일한 한문해는 사하(야쿠티아)공화국 알단으로 가 벌목과 금광 채굴 일을 했다. 배성동 작가는 “한문해는 올긴스키를 떠나 시베리아 북부 사하공화국으로 갔는데 만약 그가 고려인이 거의 없는 야쿠티아 벽촌이 아니라 고려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선택했다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1931년 이후 한문해의 행적은 후손들의 구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후손들에 따르면 공산당 가입이 거부된 한문해는 1932년부터 1936년 사이에 알단에서 서북쪽으로 약 900킬로미터 떨어진 뉴르바로 갔다. 사하공화국 수도 야쿠츠크에서도 북서쪽으로 약 8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변방 도시다. 뉴르바에서 한문해가 처음 일한 곳은 뉴르바에서도 90킬로미터 떨어진 호룰라에 있는 집단농장이었다. 지난 9월 호룰라 마을을 찾아간 배성동 작가는 “시베리아 황무지 길을 종일 달려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라고 말했다. 호룰라 마을의 니콜라이 예비치 이반(85세) 촌장은 한국인이 찾아온 건 배 작가가 처음이라고 했다.

한문해가 살았던 집터는 호룰라 마을 외곽의 작은 호수가 있고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들판 구릉지에 있었다. 집은 이미 없어졌지만 얕게 파인 집터 흔적은 남아 있었다. 집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협동농장이 있었다. 민들레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민들레농장이라고 불렸다. 협동농장 40명 인부가 생활했던 숙소와 식당, 목욕탕, 치즈를 만들었던 공장 건물이 남아 있다. 한문해는 이곳에서 감자와 채소, 밀, 담배, 양귀비를 재배하고 목축 일을 했다.

야쿠츠크에서 호룰라까지 왕복 1900킬로미터를 배 작가와 동행한 한 타티아나는 할아버지 한문해가 늘 씨앗을 지니고 다녔고 잠잘 때도 씨앗을 베고 잤다고 했다. 이반 촌장은 한문해가 특산물 전문가로 통했다며 감자, 양배추, 당근, 사탕무 같은 특산물을 재배해 노력 영웅으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아픈 사람에게 침을 놓고 양귀비 씨앗을 먹여 치료하기도 했다. 마을을 습격한 곰과 싸워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한문해는 니콜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 니콜라이는 1936년 야쿠티아 여성 요르바와 결혼했다. 1937년 아들 재미온과 1939년 딸 안나가 태어났다. 한문해는 틈틈이 바구니를 짜거나 목기 공예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그는 호룰라 집단농장에서 뉴르바 시장으로 나갈 때 두 자녀를 마차에 태워 다녔다. 한문해는 딸 안나를 ‘눈이 큰 소녀’라고 불렀다. 그는 아들과 딸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재미온과 안나는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

안나는 야쿠티아인 바슬리에프 아바나시와 결혼해 5남 4녀 아홉 자식을 낳았다. 타티아나는 막내딸이다. 교육열 높은 부모를 따라 야쿠츠크로 이주한 아홉 남매는 모두 정규 교육을 받았다. 이반 촌장에 따르면 한 니콜라이는 1946~47년경 호룰라를 떠나 뉴르바로 옮겨갔고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문해의 무덤은 뉴르바 외곽에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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