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에서 쿠르스크는 전쟁의 광기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비극의 무대로 기억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 참패를 당한 나치 독일은 초조히 동부 전선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당시 소련 쿠르스크 지역에선 서쪽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돌출부 모양의 전선이 형성됐는데, 나치는 이 돌출부를 포위ㆍ섬멸해 전선의 주도권을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나치는 1943년 7월 5일 쿠르스크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에서 두 갈래로 대공세를 시작했다. 병력 90만, 전차 3000여 대, 항공기 2000여 대를 동원했다. 동부 전선의 가용 전력을 총결집했다. 히틀러는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스탈린은 병력 190만, 전차 6000여 대, 항공기 3000여 대로 맞섰다.
이후 한 달여간 쿠르스크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여의도 면적만 한 공간에 수백 대의 전차가 뒤엉켜 ‘백병전’을 벌였으며, 보병들이 엄폐물도 없이 적의 참호로 돌격하다 집중포화에 찢겨 나가는 지옥도가 무수히 펼쳐졌다. 나치와 소련 모두 최악의 전체주의 정권이었으니 병사들의 목숨값은 파리만도 못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독일군의 교환비는 소련군보다 높았지만, 소련군의 물량 공세는 무지막지했다. 결국 독일군은 20만 명의 사망ㆍ실종, 60만 명의 부상자를 낳은 채 후퇴했다. 소련군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란 게 정설이다. 그럼에도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동부 전선의 주도권은 완전히 소련에 넘어갔고 나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나치가 대공세를 포기하고 방어선을 강화하는 전략을 택했더라면 독소 전쟁의 종결이 꽤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소련의 동원력을 간과한 나치의 오판이 끔찍한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전쟁의 광기를 보여준 비극의 무대
북 파병으로 한민족에도 비극의 땅
북한군 피는 한국 찌를 창이 될 것
쿠르스크의 비극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1993년 러시아는 쿠르스크 전투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취역을 앞둔 오스카II급 핵추진 잠수함에 쿠르스크란 이름을 붙였다. 배수량 1만8000t급의 최신예 쿠르스크함은 핵탄두 미사일 24기를 장착한 러시아 해군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2000년 8월 12일 쿠르스크함은 노르웨이 바렌츠해에서 훈련을 하다 어뢰실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해 108m 해저로 침몰했다. 예산 부족에 따른 장비 관리 부실, 러시아군 특유의 안전불감증, 엉성한 선체 설계 등이 결합해 초래한 참사였다. 사고 직후 러시아 정부는 은폐와 함구로 일관했으며 외국의 구조 지원도 거부했다. 결국 골든타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영국ㆍ노르웨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이 8월 20일 잠수함의 해치를 열었을 땐 이미 118명의 승조원은 모두 사망한 뒤였다. 나중에 인양된 콜레스니코프 대위의 시신에선 “여기 9번 격실에 23명이 있다. 살아남기를 바라는 인원들의 명단을 첨부한다”는 메모가 발견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제 쿠르스크는 한민족에게도 비극의 땅이 될 참이다. 1만여 명의 북한군이 러시아의 용병 신세가 돼 쿠르스크에서 우크라이나군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북한군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독재의 규모는 달라도 질적인 면에선 히틀러ㆍ스탈린에게 손색이 없는 북한 김정은은 젊은이들의 핏값으로 러시아의 군사기술 지원을 얻어내려 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북한 병사의 대부분은 이번이 첫 해외 경험일 텐데 상당수는 살아생전에 북한 땅을 밟지 못할 운명이다. 생경한 이역만리에 끌려와 의미도 알 수 없는 전투를 벌이다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고향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를까.
그렇다고 우리가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다. 북한군의 피는 곧 우리를 찌르는 창으로 돌아온다. 러시아가 북한에 군사위성·전술핵·핵추진잠수함 등의 기술을 넘겨줄 경우 한국의 안보는 심대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동맹국들과 철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 쿠르스크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