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불평등과 정부의 소셜미디어 접속 차단 등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네팔에서 대법원장 출신 수실라 카르키(73)가 임시총리로 임명됐다. 네팔 대통령실은 의회를 해산하고 내년 3월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의회 해산이 위헌이라는 논란이 일어 정국 혼란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람 찬드라 포우델 네팔 대통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카르키 전 대법원장을 임시총리로 지명했다. 카르키는 지명 당일 네팔 역사상 첫 여성 총리로 취임했다.
카르키 전 대법원장은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수천명의 청년 활동가들이 온라인에서 치열하게 토론한 끝에 임시총리 적임자로 정한 인물이다. 2016년 7월 부임해 ‘네팔 최초 여성 대법원장’ 기록을 세운 그는 재임 기간 대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가 1년간 대법원장을 지내는 동안 대법원은 네팔 정부가 불공정하게 임명한 자야 바하두르 찬드 당시 경찰청장의 취임을 무효화하고, 시민단체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의 판결을 내렸다.
카르키 총리는 왕정독재 판차야트 정권에 저항하는 1990년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된 전력이 있다. 대학 시절 문학을 전공한 그는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소설 <카라>에 녹여 책을 집필했다. 정치학 석사와 법학 학사 학위를 보유한 카르키 총리는 변호사, 판사 등으로 일했다.
카르키 총리는 취임 후 첫 대외 일정으로 시위 중 다친 시민들이 입원한 카트만두의 병원을 찾았다. 그는 부상자들에게 “용기 있는 행동에 감사하다” “불평등과 부패를 근절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 “여러분이 안전하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라며 위로를 전했다고 네팔 언론은 전했다.

네팔 대통령실은 카르키 총리 지명 당일 하원 해산을 선포하고 내년 3월5일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카르키 총리는 조만간 신임 장관을 임명해 약 6개월 동안 임시 정부를 이끌 예정이다. 네팔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 원수이고 실권은 총리에게 있다.
포우델 대통령의 의회 해산이 위헌이라는 논란도 일고 있다. 네팔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총리가 의회로부터 신임을 잃었을 때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데, 사임한 샤르마 올리 전 총리에 대한 의회의 불신임 투표가 이뤄지지 않았다.
하원에서 최다석을 가진 정당 네팔의회(NC)는 “헌법을 위반하는 어떠한 조치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정부에 해산 철회를 요구했다. 마오주의 계열 공산당도 의회 해산이 “헌법 체제에 반하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네팔 변호사협회는 성명을 내고 “대통령의 자의적인 의회 해산은 위헌”이라며 의회 해산이 네팔 국민이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 공화주의, 포용성, 연방주의 등을 약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서 네팔 경찰은 지난 12일 기준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 21명, 수감자 9명, 경찰 3명, 시위와 무관한 시민 18명 등 5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네팔 당국은 시위 과정에서 탈옥한 전국 교도소 수감자 1만2500명가량을 추적하고 있다.
이번 시위는 정부가 시민들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제한하자 지난 8일 청년층 주도로 시작됐다. 정부의 부패와 사회 특권층에 대한 항의의 의미도 담긴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시민 간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고 정부 청사와 올리 전 총리 자택 등에서 방화가 일어났다. 네팔 당국은 13일 카트만두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했고 현재 시위는 소강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