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트리거 60' ㊷ 성수대교 붕괴와 재난사회

딱 31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 다리 중앙부 48m 상판이 갑자기 무너졌다. 다리를 지나던 시내버스 등 차량 6대가 순식간에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등교하던 무학여중·고 학생 9명을 포함해 시민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멀쩡하게 보이던 다리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뚝 끊어지나”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고를 두고 “국가 인프라 붕괴의 경고”라며 사회 전반의 안전 불감증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성수대교 붕괴는 제도와 조직의 결함이 인적 오류와 맞물려 발생한 복합적 사건이었다. 당시 건설 행정은 저비용, 단기 완공을 우선시했다. 교량 설계와 시공 과정에서도 전문 인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무리한 일정과 기술적 실험이 강행됐다. 정부의 비현실적인 단가 책정은 부실 자재 사용을 유도했다. 감리 제도는 형식적이었다. 여기에 철근 용접부의 엉터리 시공, 규정 위반 중량차 통행 방치, 균열 징후에 대한 보고 무시 같은 위험 요소가 더해졌다. 성수대교 붕괴는 한국의 압축적 산업화가 안고 있던 ‘속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안전과 생명의 가치를 압도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95년 6월 29일, 이번에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 서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단 20여 초 만에 지상 5층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502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백화점 건물은 용도 변경을 반복하면서도 전문가 심사 없이 설계가 변경됐다. 무리한 증축과 값싼 자재 사용, 무거운 냉각탑의 옥상 설치와 이동, 붕괴 조짐을 인지하고도 영업을 강행한 경영진의 무리수가 피해를 키운 결정적 요인이었다. 시공·감리·행정이 뇌물과 관행으로 얽혀 부실을 묵인했다.
붕괴 사고 직후 백화점 회장 이준은 “무너진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고 고성을 질렀다. 이런 탐욕과 제도적 안전 불감증의 결합은 눈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안전’을 ‘비용’ 취급, 대구지하철의 비극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사건은 단순한 건축물 붕괴가 아니었다. 우리가 그동안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재난이 자연재난에서 기술재난(인간이 만든 기술과 인간의 실수나 오류가 결합해 발생하는 재난)으로 변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은 1970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10%의 고도성장을 자랑했다. 불과 25년 만에 경제 규모는 70배나 커졌다. 산업기술이 중심을 차지하는 사회가 됐다. 서울, 특히 강남 개발은 이런 고속 성장의 상징이었다. 강남권에서 발생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속도전을 내세운 압축 성장의 시대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효율에 취한 ‘성장의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시설물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교량·터널·건물 등 주요 시설물에 대한 정기점검과 정밀 안전진단이 의무화됐다. 전문기관인 한국시설안전공단을 설립했다. 설계·시공·감리 전 단계에서의 부실과 비리를 막기 위해 건축법상의 처벌 조항도 강화했다. 부실시공이나 허위 감리로 인한 사고에는 형사 책임이 따르게 됐다. ‘속도’가 미덕이던 사회에 ‘안전’이라는 가치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법과 제도를 새롭게 만들고 안전사회를 다짐했지만 재난은 잇따랐다.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192명 사망)은 지하철 내부에 불에 잘 타는 내장재가 사용된 것이 화재를 확산해 피해를 키웠다. 이는 낮은 낙찰가 경쟁과 이윤 중심의 발주 구조가 낳은 한국식 개발의 귀결이었다. 비상 대피 훈련의 부재와 매뉴얼 중심의 경직된 대응 체계는 위험을 증폭시켰다. 이 참사 역시 ‘안전’을 ‘비용’으로 취급한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가 만든 비극이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에 지하철 내장재는 불이 붙지 않는 재질로 모두 바뀌었고, 이전보다 지하철은 안전해졌다.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304명 사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세월호는 불법 개조로 복원성이 극히 불량해졌지만, 화물 적재량 제한을 초과해 운항했고, 감독기관은 금품과 인맥에 기대어 이를 묵인했다.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비용 절감을 위해 승무원 교육과 비상 장비를 최소화했고, 정부의 해운 관리 시스템은 이러한 편법을 제어하지 못했다. 후진국형 재난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도 멈추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재난과 달리 기술재난은 대체로 예측이 어렵다. 기술재난은 재난을 촉발한 사건이나 사람이 있다. 따라서 ‘신의 행하심’ 같은 초월적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작동 실패와 관리 부재 속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책임 회피·전가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확대되고, 회복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은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다. 자연재난은 파괴를 겪은 후에 오히려 연대와 복구의 힘을 발휘한다.
삼풍 희생자 추모공간, 현장서 6㎞ 떨어져
반면에 기술재난은 사회의 신뢰와 결속을 해체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가해자의 책임 소재를 놓고 지루한 법정 공방이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복잡한 기술의 특성상 책임이 분산됐다가 훅하니 사라져버릴 때가 많다. 기술재난은 단순한 기술 실패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윤리적·사회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이런 이유로 기술재난은 현대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책임과 회복성의 문제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대형 참사들을 겪으며 한국 사회의 안전 기준을 조금씩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재난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고통스러운 투쟁과 노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재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바로 ‘기억’이다. 빠른 발전과 개발이 재난을 가져왔듯, 재난을 기억 속에서 지우는 속도에서도 한국은 세계 최고가 아닐까. 때로는 아예 감추고 싶어 하기도 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후 어처구니없는 참상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허리가 동강 난 성수대교를 그대로 보존하자” “다리 잔해를 타임캡슐에 넣어 물려주자” “잔해를 모아 만든 조형물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세우자”는 주장들이 나왔다.

현재 이 사건을 기억하는 조형물은 희생자 위령비가 유일하다. 성수대교 북단 나들목(IC)에 있는 위령비는 강변북로 사이 외딴섬 같은 공간에 마련돼 있다. 도보는 물론 차량으로도 접근이 어렵다. 지도에 따로 표시돼 있지도 않아 시민들 대부분은 이곳에 위령비가 있는지도 모른다.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기억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말이다.

삼풍백화점 희생자 위령탑은 사고 현장에서 6㎞ 떨어진 양재 시민의 숲에 있다. 당시 서울시는 사고 현장에 위령탑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비싼 땅값과 주민들의 반대에 막혀 참사와 아무 관계 없는 장소에 기억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대형 참사는 끊이지 않았지만, 기억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데 한국 사회는 인색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자리는 그대로 추모 공간이 됐다. 붕괴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는 2개의 인조 연못이 만들어졌다. 연못 주변을 둘러싼 추모비에는 희생된 279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 공간은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시민들도 국가적 참사를 기억하고 공유해야 한다. ‘기억’의 또 한 가지 방법으로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재난 조사를 철저히 해 제대로 된 ‘백서’를 남기는 것이다. ‘기억’의 공유는 안전한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모든 재난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사건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산 자와 희생자 사이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진 ‘재난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고교 평준화’ 편입니다.

홍성욱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