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들의 연이은 실패와 비극을 바라보며 개헌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아졌다. 대선주자들도 개헌을 약속하며 개헌이 이번 대선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개헌은 또한 판도라 상자 같은 것이다. 개헌에 대한 지지는 높으나 어떤 개헌, 어떤 헌법정신, 어떤 권력구조로 개편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 국민적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헌정회 차원에서, 국회 차원에서, 일부 개헌추진 모임들에서 안이 만들어져 왔을 뿐이다. 개헌논의는 헌법학자나 정치학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국회에서 개헌이 논의되면 내각제 지지가 주를 이루게 된다. 학자들은 선진국들의 모델을 들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답인지는 분명치 않다. 권력구조만 바꾸면 지금의 한국 정치가 달라질지도 분명치 않다.
대통령 권력분산 신중히 접근해야
승자독식은 주로 인사 전횡에 기인
대통령의 정책 역량은 넓혀줄 필요
개헌만으로 정치·정당행태 못 바꿔
우리는 수천 년을 초저압의 절대왕정 체제에서 살다가 서구가 수 세기에 걸쳐 계몽시대와 혁명을 통해 탑을 쌓아 올리듯 발전시킨 초고압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해방 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선물처럼 받아들었다. 시대적, 제도적, 문화적 변압기 없이 받아든 이 제도가 이 땅에서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그래도 그 짧은 기간에 이만큼 소화해 온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다. 우리 국민의 교육과 지식수준이 그만큼 빠르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의식과 삶의 저변에는 여전히 유교적 문화에 바탕을 둔 위계의식과 행동 관행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헌법 체계는 완전 서구적 자유민주체제이나 가정, 학교, 직장의 질서는 동양적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합리적 토론, 수평적 관계, 타협, 협력이라는 민주적 문화는 아직 정착되어 있지 않다. 제도, 인식, 행동양식이 따로 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당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보라.
우리에게는 우리의 살아온 길과 익숙해져 있는 삶의 방식이 있고, 경제발전도 우리식으로 해왔다. 꼭 서양 제도와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 일본만 해도 ‘55년 체제’에서 주로 일당집권의 일본식 민주주의를 해오고 있다. 유교 전통을 가진 아시아 국가 중 지금 우리가 가장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따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내용은 처참하다. 지난 20년간 세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 되고 두 대통령이 임기 중 물러났다.
개헌 관련 대부분 주장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이며 대통령 권력분산이 정답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증세에 대한 병인을 충분히 분석했는가? 오늘날 정당, 정치 문화가 대통령 권력만 약화시키면 달라질 것인가? 민주화 이후 대통령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어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는가? 오히려 국회의 견제가 지나쳐 국정이 오가지도 못하고, 5년 단임제로 인해 장기적, 구조적 과제에는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대통령 권력이 제왕적이라고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인사 독점이다. 국회청문회가 도입되었지만 실제 운영에 문제가 많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쟁의 장만 되고 실효성도 없어졌다. 어느 정당이든 야당이 되면 사사건건 대통령과 여당의 정책을 반대하고, 수렁에 빠뜨리려는 것은 정권투쟁을 위해서다. 그러나 그 정권 쟁취의 가장 큰 목적은 그들의 철학과 비전 실현보다 그들끼리 자리를 차지하고 나누어 갖는 것으로 보였다. 승자독식은 결국 정책보다 인사에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가 보다 합리적이고 탕평적으로 이루어지게 할 적절한 견제와 균형 장치가 필요하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는 3권분립으로 충분하다. 행정부의 권력을 다시 대통령과 총리 간에 나누는 것은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 비효율과 갈등의 요소를 키우게 된다. 대통령제는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행정부와 국회 간에 권한을 재배분하는 것을 검토해볼 만하다. 다른 민주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많은 국회의 입법사항을 줄이고 대통령령으로 시행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늘리는 것이다. 대통령 중임제로 권한과 책임을 강화하고 여소야대가 될 기회를 줄이기 위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기간을 맞출 필요도 있다. 국정의 책임성, 장기적 일관성이라는 면에서 장점이 있다.
이는 필자의 견해일 뿐이다. 더 적절한 의견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개헌과 같이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극히 중요한 사안이 단순히 선거 중 정쟁의 대상만이 될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국민의 넓은 참여하에 숙고와 진지한 토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모델을 참고할 필요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스스로의 의식체계와 행동양식, 전통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이념적, 이상적 접근을 지양하고 실사구시적 접근을 해 나가야 국가 정체를 막고 미래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