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던 19세기 초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는 토대를 마련한 여성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삶이 무대 위에서 부활했다. 배우 안은진의 7년 만의 연극 복귀작, ‘사일런트 스카이’(연출 김민정, 28일까지)가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영화 ‘시민덕희’를 비롯해 MBC ‘연인’, JTBC ‘나쁜엄마’ 등 종횡무진 활동해 온 안은진의 인기 덕에 지난달 29일 개막한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2012년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데뷔 후 연극 ‘유도소년’(2017)까지 꾸준히 무대에 섰던 안은진은 9일 기자간담회에서 “몸의 표현을 확장하려고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함께 출연한 뮤지컬 배우 출신) 전미도 언니한테 조언도 받았다”고 말했다.
‘사일런트 스카이’는 근대 여성 과학자를 잇따라 다뤄온 미국 극작가 로렌 군더슨의 작품. 김민정 연출은 저마다의 유리천장을 깨고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여성들의 연대기를 그려냈다.
연극의 첫 장면, 1900년 미국 위스콘신주 시골 목사의 딸 헨리에타(안은진)가 하늘과 맞닿은 무대 안쪽에서 걸어 나온다. 희미하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진다. “빛의 과학이 저 높은 곳에 있습니다. 아득히 먼 곳, 외로이. 우주의 가장 깊은 어둠에 묻힌 모든 것들 중에.”
당시 천문학계에서 여성 과학자야말로 어둠 속에 묻힌 존재였다. 결혼하지 않고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헨리에타의 결심은 여동생 마거릿(홍서영)의 염려에 가로막힌다. “요즘 여자들 바지 입고 다니는 거 가관이더라.” “세상이 변해도 지켜야 하는 게 있어.”
하버드 천문대에 가서도 헨리에타는 건판에 찍힌 별을 수도 없이 맨눈으로 분류할 뿐이다. 여성은 천문대 망원경 사용조차 금지됐기 때문이다. 하버드 최초의 여성 컴퓨터(계산원)이자 뛰어난 광도 측정가 윌러미나 플레밍(박지아), 항성 분류법 기준을 마련한 애니 캐넌(조승연) 등 업적을 세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성취가 발판이 된 중요한 연구에선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사일런트 스카이’는 시대의 장벽을 뚫고 삶과 우주를 개척하는 여성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헨리에타와 애니, 윌러미나의 연구 열정은 침묵을 강요받을수록 밝고 강하게 타오른다. 가정부로 일하다가 여성 컴퓨터가 된 윌러미나는 어떤 상황도 웃으며 돌파한다. 애니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뛰어든다.
배우들은 하버드 천문대 여성 실화를 재조명한 논픽션 『유리우주』, 『리비트의 별』 등을 “바이블처럼 읽고”(안은진) “현직 여성 과학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며”(조승연) 캐릭터를 준비했다.
무대를 수놓는 작은 별빛들은 헨리에타의 연구가 우주의 진실에 다다를수록 환해진다. 그가 세페이드 변광성의 광도와 깜빡이는 주기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레빗 법칙은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우주의 팽창을 입증한 ‘허블의 법칙’의 근간이 된다. 이런 공로는 헨리에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김 연출은 “21세기가 다양성과 동시대성을 기준으로 펼쳐지고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지워졌던 개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더 힘 있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