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러시아 사이에 낀 폴란드의 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9-03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과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현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 간의 독·소 불가침 조약(일명 ‘나치·소비에트 협정’)이 있었다. 이는 ‘독일과 소련이 서로 싸우지 말고 동유럽 지역을 사이좋게 나눠 갖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에 따라 폴란드가 서부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우는 동안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기진맥진해진 폴란드군은 결국 무너졌다. 사전에 공모한 대로 독일이 폴란드 서부, 소련은 동부를 각각 차지하며 나라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독·소 불가침 조약은 2차대전 도중인 1941년 6월 독일이 약속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며 폐기됐다. 이로써 소련은 나치 독일을 적으로 삼아 싸우던 영국, 미국 등 연합국과 한배를 탔다. 폴란드에겐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1945년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날 때 소련은 ‘전범국’은커녕 영국·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3대 전승국 일원이었다. 얼마 전까지 폴란드의 정복자이자 압제자였던 스탈린이 이제 폴란드의 해방자요, 구세주로 둔갑한 셈이다. 폴란드는 한때 철천지원수로 여긴 소련 영향권에 들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으니 이런 비극이 따로 없다.

동서 냉전이 끝나가던 1989년 폴란드에 비(非)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어 1991년 옛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며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공산주의와 러시아 문화가 지긋지긋했던 폴란드는 서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폴란드계 주민이 많이 사는 미국은 정치권이 앞장서 폴란드를 자유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적극 나섰다. 미국의 후원 아래 폴란드는 1999년 체코, 헝가리와 더불어 옛 동구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했다. 2004년에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지위도 얻었다. 함께 EU에서 활동하며 독일과 구원(舊怨)을 풀었다고는 하나 2차대전의 참혹한 기억 때문인지 폴란드인들 마음에는 여전히 앙금이 맺혀 있다. 폴란드와 독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카롤 나브로츠키 신임 폴란드 대통령이 3일 미국 백악관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나브로츠키는 지난봄 대선 후보 시절부터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 예산 비율이 4.5%에 달하는 폴란드는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지 말고 방위비 지출을 더 늘려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문을 가장 잘 실천해 온 국가로 꼽힌다. 현재 1만4000명 규모인 주(駐)폴란드 미군 병력에 대해 트럼프가 감축은커녕 “폴란드가 원하면 더 많은 군인을 두겠다”고 다짐했다니 나브로츠키로선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일 것이다. 동쪽의 위험한 이웃(러시아)과 서쪽의 신뢰가 안 가는 이웃(독일) 사이에 낀 폴란드로선 미국으로부터 안전 보장을 받는 것이 국익을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닐까 싶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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