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기후, 국민밥상·농민 생존권 ‘위협’…“농업 지속성 담보 못해” 전문가 10인 제언

2024-12-30

지난해 농산물 수급불안에 따른 물가문제가 사과·배추에 이어 겨울철 감귤·딸기로 이어지면서 국민은 기후변화가 농업과 밥상에 끼치는 영향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 심각하게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우리 농업과 농촌, 무엇보다 농정이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있는지 시급히 진단해봐야 할 이유다.

‘농민신문’은 을사(乙巳)년 한해 기후변화에 대응한 우리 농업의 ‘탈피’ 방안을 집중 조명할 계획이다. 그 시작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본다.

기후변화, 세계 곡창지대 강타…“식량위기 초래할 것”=전문가들은 기후변화가 가져올 세계적인 먹거리 위험에 공히 우려를 표한다. 강신규 한국농림기상학회장(강원대학교 교수)은 “주요 식량 생산국이 자리한 중위도 지역이 극심한 기후변동의 위험지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기후변동성이 심해지면서 수분을 듬뿍 머금은 바람길이 (중위도 지역을 벗어나) 북쪽 혹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채 수년간 머무르면서 수년간 주요 식량 생산지역에 가뭄이 닥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주량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전세계 수온 상승으로 태풍과 허리케인이 중위도 지역에 있는 곡창지대를 강타하고 있다”면서 “곡창지대 북상이 필요하지만 거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당분간 식량작물은 물론 유지작물도 작황과 가격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같은 상황은 글로벌 식량 공급망의 경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곡물 수급불안과 가격 상승은 단기적인 수출 제한 조치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현경 농협미래전략연구소 부연구위원도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국에서 국내 생산 확대, 적절한 식량 비축 등 식량안보를 강조하는 법안이 등장했다”고 짚었다.

문제는 세계 각국에 차별적으로 닥칠 식량위기다. 김광수 국가농림기상센터장(서울대학교 교수)은 “이상기상 조건에서도 작물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중심으로 글로벌 식량 공급망이 재편될 텐데, 기후변화 적응 인프라와 연구개발(R&D) 기반이 갖춰진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재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결국 기후위기 대응 인프라가 부족한 곳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창길 대통령 소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농어촌분과위원장(서울대 특임교수)도 “글로벌 식량 공급망이 기후위기로 약화되면 취약계층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고, 식량 부족 문제가 국가간 식량확보 경쟁을 심화시켜 분쟁·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측면에선 농업계에 기후변화 대응·적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강신규 학회장은 “세계적으로 강화되는 화석연료와 플라스틱 사용 규제 정책이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농업의 생산 비용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임영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영농법 보급 필요성도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농업도 큰 도전 직면…농정 큰 그림 부재 우려=기후변화에 따른 전세계적 충격파는 한국 농업에도 큰 도전을 안길 것으로 전망된다. 강신규 학회장은 “바람과 엘니뇨·라니냐, 서태평양의 수온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우리나라 기후현상에 참여하는 봄·가을철에 기후변동 불확실성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열파(heat wave) 영향에 따른 극심한 여름 무더위, 강력한 가을태풍을 일상적 기후현상으로 여기고 대비해야 한다”고 짚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건 농작물 공급 충격에 따른 농가와 소비자 피해다. 김광수 센터장은 “국내 농가 대부분이 노지에서 작물을 재배하고 있어 기후변화에 취약하다”면서 “농업 생태계 변동이 농업경영 불확실성을 증대시키고, 농산물 시장가격 변동은 소비자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장은 “한국의 고령농민이 폭염·홍수·가뭄·한파·병해충 등 기후위기 재난이라는 혹독한 노동 환경에 내몰리게 됐다”고 진단했다.

대응은 쉽지 않다. 이주량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농업은 품종과 품목, 재배·방제 기술, 작부체계 등 기술부터 농지 위치, 수리·관개 시설 등 모든 인프라까지 온대농업에 맞춰져 있다”면서 “기후변화가 지속돼 한반도가 완연한 아열대성 기후 패턴을 띠게 되면 우리 농업도 재설정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거대한 과제가 눈앞에 닥쳤는데도 농정 큰 그림이 부재한 점을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남재작 소장은 “현재 정부가 연구과제를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 있는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며 “국내 생산과 글로벌 공급망을 통한 식량 확보 등에 거시적 전략도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대책은? “연구·기술개발 투자 늘리고 농정 밑그림 다시 그려야”

농정 패러다임 전환…“기술과 정책 현장에 닿아야”=전문가들은 기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농정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R&D를 통해 기후변화 대응 기술을 마련하되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체계와 농민들의 실질적인 수용력 강화 방안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주량 선임연구위원은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R&D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서 재배할 ‘인디카’ 벼 품종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기후위기가 눈앞에 닥친 뒤에야 비로소 연구가 탄력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작물별로 특화된 영농기술 개발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강신규 학회장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저온피해·습해 등 재해에 대한 작물 생리 연구와 물리적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며 “당해 기후 예측을 토대로 파종 시기를 판단하는 등의 영농 결정을 지원하는 시스템 개발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 개발의 성과를 농가에 확산하기 위해선 체계적인 정책 뒷받침이 필요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광수 센터장은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면 재생에너지 확대 등 다양한 정책이 필요하다”며 “이를 총괄할 정책 컨트롤타워 구축이 필수”라고 지적했다. 이어 “농림축산식품부를 중심으로 관련 기관들이 연계해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술과 정책이 현장에서 효과를 내려면 농민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임영아 연구위원은 “농민이 활용할 수 있는 가공된 정보가 여전히 부족하고 접근성이 낮다”며 “사용자 친화적인 정보 생산과 농민 대상 교육을 확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인센티브 정책도 요구된다. 조현경 부연구위원은 “농업환경보전프로그램을 직불금 형태로 전환해 농가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 식탁을 지킬 식량안보 전략은=전문가들은 우리 농업의 기후변화 적응을 포함해 국민 식탁을 지킬 전체적인 식량안보 종합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국내 곡물 자급률이 약 20%에 머무르는 상황에서 국내 생산기반 확충이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맹승진 한국농공학회장(충북대학교 교수)은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인 문제이므로 식량 수입이 제한되는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며 “실내농업 확대 등 첨단농업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민 1인당 밭 1평(3.3㎡) 가꾸기’ 같은 국민 참여형 정책으로 생산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생산기반 강화와 함께 공급망 리스크 분산, 공공비축 확대를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도 시급하다.

김광수 센터장은 “기후위기 시대의 식량안보 문제는 단순히 수입 확대나 자급률 증대로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 과제”라며 “국제 협력을 통한 공급망 다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창길 분과위원장은 “다양한 국가와 식량 수입 계약을 체결해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고, 밀·콩 등 주요 곡물의 일정 물량을 공공비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식량안보를 지킬 수 있게끔 법적 근거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상기 한국친환경농업협회장은 “‘먹거리기본법’을 제정해 식량안보의 최소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 차원의 종합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진 소장은 “범정부가 식량안보 강화 방안을 논의할 협의체를 꾸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속가능한 농촌 해법 ‘재생에너지’=기후변화는 에너지 비용을 끌어올리고 야외활동을 어렵게 하는 등 농촌 일상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임영아 연구위원은 “농촌주민이 기후변화에 취약하다고 판단되면 사회안전망 관점에서 취약계층으로 보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변화 시대에 농촌 일상과 영농을 지속할 해법으로는 재생에너지가 거론된다. 김광수 센터장은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를 주로 사용하는 시설농업의 에너지 비용 증가는 농작물 생산 단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영농형 태양광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재생에너지 기반의 생산관리 체계를 구축하면 농업분야의 탄소중립 실현도 더욱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장기적으로 농촌에 에너지 자립 마을을 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상기 회장은 “마을 주민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에너지 자립 마을을 설계해 ‘햇빛농사’와 ‘바이오에너지농사’로 생산한 전기를 전기농기계에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맹승진 학회장도 “농가 단위로 에너지 제로 기술을 도입한 뒤 이를 마을 단위로 확장해야 한다”며 농촌의 에너지 자립 필요성에 힘을 실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에너지 전환이 농업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주량 선임연구위원은 “현대 농업이 에너지 소비처였다면 미래농업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동시에 생산처”라며 “농촌의 에너지산업 확대를 위한 범부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독일은 이미 농가소득에서 에너지 생산이 차지하는 소득이 농업소득보다 높다”며 “이제 우리도 대책을 농업과 에너지의 융합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마트농업도 에너지 소비를 줄일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김창길 분과위원장은 “시설농업에서 센서와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해 농작물의 온도·습도·토양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양석훈·최소임·박아영 기자 shakun@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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