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증명한 ‘639년의 낙뢰’, 그 순간…무왕의 익산 천도 3번째 퍼즐 맞췄다

2025-05-20

과학으로 증명한 ‘639년 낙뢰’, 그 순간...무왕의 익산 천도 3번째 퍼즐 맞췄다

‘이것이 꼭 1386년 전인 639년 떨어진 벼락(낙뢰)의 흔적이다.’ 얼마전 <한국고고학보>(2025년 3월호)에 따끈따끈한 논문이 실렸다.

전북 익산 제석사터에서 두 동강으로 방치되었던(지금은 붙여놓음) 목탑의 심초석을 자력 탐사로 분석한 논문(오현덕·한광휘의 ‘자력탐사를 통한 익산 제석사 목탑에 내리친 낙뢰(벼락)의 과학적 고찰’)이었다. 커다란 심초석이 두 동강 난 이유로는 ‘벼락 때문’으로 짐작되었다.(후술) 따라서 이번 자력탐사는 ‘벼락을 맞은’ 직접증거를 찾기 위함이었다.

■양번개, 음번개

번개는 구름과 구름, 구름과 지표면 사이에서 공중 전기의 방전이 일어나 만들어진 불꽃이다. 그 중 지표면에 떨어진 것을 벼락(낙뢰)이라 한다. 벼락은 한 번에 떨어지지 않는다. 두 단계로 나뉘어 친다. 전하 입자들이 구름에서 지그재그로 내려오다가(하강 리더) 땅(혹은 높고 뾰족한 곳)에서 발생하는 다른 극성의 상승 리더를 만나기까지를 1차 방전(리더·leader)이라 한다. 그렇게 하강리더와 상승리더가 만나면 강력한 방전이 일어나 1차 번개가 왔던 통로를 따라 전류의 흐름이 발생한다. 이것을 2차 방전(주 방전)이라 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벼락이 2차 번개 섬광이며, 이때 에너지가 높아 화재가 건물의 파괴 등 여러 피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벼락(번개 또는 낙뢰)도 한 종류가 아니다.

구름에서 땅으로 이동하는 전하(1차 번개)는 두 가지다. 음(-) 전하면 ‘음의 번개’, 양(+) 전하면 ‘양의 번개’로 구분된다. 음의 번개일 경우 땅 표면에서 전류의 방향은 바깥→중심 방향이며, 땅에서 구름으로 솟구치는 전류를 갖는다.

반면 ‘양의 번개’일 경우 전류는 구름→땅으로 흐르고, 땅 표면에서는 중심→바깥으로 흐른다. 지상에 떨어지는 벼락의 90%는 ‘음의 번개’이고, 10%만이 ‘양의 번개’로 알려져 있다. ‘양의 번개’는 ‘음의 번개’보다 평균 3~4배 강하고, 그만큼 화재의 발생 가능성도 높다. 또 하나의 팁이 있다.

지상의 토양(흙)에는 약 4% 정도의 철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때문에 외부에서 자기장을 가하면 제거 후에도 계속 자화(자석의 성질)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이를 유도 잔류 자화라 함) 사실 번개(전기)는 뜨겁지 않다. 다만 번개가 대기를 지나면서 질소와 산소 원자를 흥분시켜 강한 열과 빛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벼락이 나무에 떨어지면 나무의 저항적 발열 때문에 불에 타고, 땅에 떨어지면 문자 그대로 ‘번개 모양으로’ 수미터에서 수십미터로 길게 뻗어간다. 그러면서 번개(벼락)의 전류가 강력한 자기장을 일으키고 토양 등에 번개 유도 잔류자화를 남긴다. 이 부분을 주목하여 ‘자력탐사’를 시행하는 것이다. 열 및 번개 유도 잔류자화를 측정하여 유적과 유구, 유물의 성질을 파악한다.

■벼락맞아 소실된 탑

이번에 제석사터의 자력탐사에서 두 동강 난 심초석이 방치되어 있던 목탑터 측정 결과가 놀라웠다.

목탑터의 네 귀퉁이 장초석은 자성 광물을 함유하고 있는 암석이었다. 따라서 일정한 세기의 자성(-55~+58nT)을 띠고 있는 것으로 측정됐다.

그런데 두 동강 난 심초석은 심상치 않았다. 자성의 세기가 장초석보다 훨씬 강했다. 양의 자화값이 +91nT, 음의 자화값이 -85nT였다.

중심에 양의 극이 발달해있고, 반응 모양이 심초석과 비슷한 크기의 사각형 이었다. 그리고 음의 극이 북편과 남편에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심초석에서 시작한 반응은 동·서쪽으로 뻗어나갔다. 특히 전류가 탑의 심초석을 통과한 지점에서 기단의 지면을 따라 동쪽으로 뻗은 반응이 매우 뚜렷하게 관측되었다. 그 뻗은 길이는 11~13m에 달했다. 측정값은 -89~+298nT(나노 테슬라·자기장의 단위)로 매우 강했다.

전류의 방향은 심초석의 균열 방향과 유사했다. 그러니 벼락에 따른 물리력(충격)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면서 심초석이 두 동강 난 것이다. 또하나, 전류가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제석사 목탑터의 심초석에 내리친 벼락은 ‘양의 번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초석이 벼락을 맞아 두동강 났다면 목탑은 어찌되었겠는가. 벼락은 탑의 금속재질인 뾰족한 상륜부(금속)를 강타한 뒤 심주(나무)를 따라 지면까지 흘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주의 전기 저항값이 매우 높아 화재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 화재로 목탑 전체가 소실·붕괴되면서 주변의 건물을 덮쳤을 것이다. 한편 땅에 다다른 벼락은 목탑의 심초석을 두동강냈고, 심초석과 기단토를 자화시켰을 것이다.(오현덕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학예실장)

■일본에서 날라온 선물

그런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벼락을 맞아 붕괴된 탑이 한 둘인가.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하지만 엄청 중요하다. ‘왜’일까. 예전부터 이곳 왕궁면 궁평 마을의 입구 쪽에 있던 수상한 유구를 유심히 지켜본 이가 있었다.

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박사(1918~2011)였다. 이유가 있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제석사’ 명문기와 1점과 인동문 평기와편 1점이 진열되어 있었다.그런데 두 기와의 뒷면에 ‘출토지=왕궁면 제석사터’라 기록되어 있었다. 황박사는 ‘제석사’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황 박사는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체수리를 주도하면서 인근의 유적을 답사했다. 그때 만난 궁평마을 주민(홍성태씨)의 고백이 놀라왔다. “공주박물관에 진열된 ‘제석사’ 관련 기와 두 점을 수습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고백하면서 그 출토 지점까지 ‘찍어’ 주었다.

그러던 1971년 3월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마키타 다이료(牧田諦亮) 일본 교토대(京都大) 인문과학연구소 교수(1912~2011)가 황박사에게 ‘뜻밖 선물’을 안겨주었다. <관세음응험기>라는 문헌자료였다.

<관세음응험기>는 4세기부터 전래된 ‘관세음보살의 영험함’을 3편으로 모아둔 중국책이다. 일본에서는 11세기 후반 양우가 베낀 필사본이 가마쿠라(鎌倉·1192~1333) 중기에 복사되었다. 이 책은 일본의 국가중요문화유산이 되어 교토(京都) 쇼렌인(靑蓮院)에 소장되어 있었다.

■639년의 천둥번개

그런데 마키다가 건네준 <관세음응험기>의 말미에 백제 관련 기사 2건이 실려있었다. 황 박사는 이 기사를 읽고 흥분했다.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새로이 사찰을 경영했다. 정관 13년 11월 하늘에서 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려 제석정사가 화재를 입어 불당, 7층 목탑, 낭방(廊房·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타 버렸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재위 626~649)의 연호(627~649)이다. 정관 13년이면 639년에 해당된다.

<삼국유사> ‘왕력’조에 “백제 무왕(재위 600~641)은 때로 ‘무강(武康)’이라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백제 무광왕=무강=무왕’을 가리킨다. 그 무왕이 ‘지모밀지’라는 곳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예부터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의 북방 구릉 일대를 ‘모지밀’이라 했다.

오랜 세월 <관세음응험기>를 베끼는 과정에서 ‘모지밀’이 ‘지모밀’로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짙다.

정리하자면 무왕은 익산(모지밀)으로 천도해서 사찰(제석사)을 세웠다, 그런데 639년 폭우가 동반된 천둥 번개로 화재가 일어나 7층 목탑을 포함한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 뭐 그런 얘기다.

<관세음응험기>의 다음 구절도 재미있다.

“(목탑의) 초석 속에는 각종 칠보와 사리병, 동판으로 만든 금강반야경을 넣어둔 목칠함이 있었다. 그런데 (화재 후) 초석을 빼내 보니 모두 불에 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어둔 목칠함만이 그대로 남아…대왕이…다시 탑을 쌓아 이를 봉안….”

목탑은 비록 전소되었지만 목칠함에 봉안했던 동판 금강반야경과 불사리병은 살아남았고, 그래서 다시 탑을 쌓아 잘 넣어두었다는 얘기다. 탑 초석 내부의 사리장엄이 벼락맞아 일어난 대화재 속에서도 불타지 않은 ‘응험’이 발생했음을 전한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금강경

경천동지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날 ‘갑툭튀’한 <관세음응험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다만 수상한 유물이 있기는 했다. 1965년 말 제석사터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확인된 사리장치다.

이때 나온 사리장치는 금도금 은판 금강경(19매)과, 금동제 내·외함 등이었다. 또한 왕궁리 석탑에서는 통일신라 말~고려시대 양식의 불상 1구도 출토됐다. 따라서 왕궁리 5층 석탑은 발견 당시부터 10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다 1971년 <관세음응험기>가 공개된 이후 황 박사 등 일부 연구자들은 제석사탑와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의 친연관계를 거론했다. 물론 재질은 좀 달랐다.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제석사 7층 목탑에는 ‘동제 금강반야경과 목칠함’을 안장했다. 그런데 왕궁리 석탑에서는 ‘금도금 은판 금강경과 금동제 내·외함’(왕궁리 5층 석탑)이 나왔다. 그러나 두 탑의 사리장엄구 구성은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관세음응험기> 공개 이후 왕궁리 5층 석탑의 밑에서 ‘목탑터(중간층)→백제 왕궁 건물터(바닥층)가 차례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데 639년 낙뢰에 따른 화재로 제석사가 전소되었다. 그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리장엄구를 (왕궁 건물터에 건립한) ‘왕궁리 목탑’에 옮겼다가, 훗날(통일신라 말~고려 초) 새롭게 조성한 ‘왕궁리 석탑’에 재안장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때 사리장엄구의 재질을 ‘금도금 은판과 금동제’로 바꿨고….

■12월 떨어진 벼락

그렇더라도 <관세음응험기>를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2003년 제석사터에서 400m 정도 북쪽의 기와폐기장에서 눈길을 끄는 발굴성과가 나왔다. 불에 그을린 흙과 함께 천부상 및 악귀상 등 각종 소조상과 벽체 및 기와편이 확인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폐기유물들은 재활용이 어려울 정도로 불에 타고, 뒤틀린 모습이었다.

즉 ‘639년 낙뢰로 인해 소실된 제석사와 7층 목탑에서 나온 폐기물을 버린 장소가 확인된 것이다.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았던 <관세음응험기>의 두번째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2025년 3월 제석사 목탑터의 심초석에 대한 자력탐사 결과로 3번째 퍼즐이 맞춰졌다. 게다가 앞서 밝혔듯 자력탐사 결과 제석사 목탑에 떨어진 벼락이 ‘양의 번개’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1년 동안 국내에 떨어지는 낙뢰를 분석하면 12월에 유독 ‘양의 번개’가 많다는 통계가 있다.

<관세음응험기>는 “뇌성벽력(양의 번개로 판명)은 639년 음력 11월(양력 12월)에 떨어졌다”고 했다. <관세음응험기>의 ‘벼락’ 관련 내용을 이토록 디테일하게,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왕도의 향기

그러나 <관세음응험기>에는 아직 맞춰야 할 4번째, 마지막 퍼즐이 남아 있다. 바로 ‘무왕의 익산 천도’ 기록이다. ‘무왕’과 ‘익산’은 심상치않은 곳이다. 우선 ‘왕궁리’ ‘궁평’ 등에서 보듯 지명부터 예사롭지 않다.

또한 1989년부터 왕궁리에서 이어진 발굴에서 주목할만한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최고급 중국제 청자 조각이 출토됐다. 또 ‘5부’명과 ‘수부(首府·수도를 의미)’명 인장와’도 나왔다. <삼국사기> ‘잡지’는 “백제가 오부(五部)를 두어 37군,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했다.

또 <주서> ‘이역전·백제조’는 “수도(1만)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 등 5부로 나누었다”고 했다. 왕궁리에서는 ‘5부’를 가리키는 인장기와가 모두 출토됐다. 왕궁리가 수도(도읍)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방증자료다.

미륵사 창건 설화는 어떨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선화공주 부부의 명을 받은 지명법사가 용화산(익산) 밑에 3탑3금당을 갖춘 절(미륵사)을 세웠다. 이것은 단순한 설화가 아니었다.

발굴결과 미륵사는 ‘중앙탑+강당’, ‘서탑+강당’, ‘동탑+강당’ 등 3탑3강당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됐다. 또 연못과 같은 습지에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절을 조성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

■무왕의 현현

2009년 1월에도 놀랄만한 발굴성과가 나왔다. 미륵사 서탑 사리기에서 ‘탑을 세운 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명문 금판이 나왔다. 그러자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이야기’와 ‘미륵사 창건’ 설화가 모두 가공이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해석이 나왔다. 무왕의 부인이 1명이 아닐 수 있으니까….

‘미륵사가 ‘3탑3금당’으로 조성되었다면 ‘서탑=사택적덕의 딸’이고, ‘중앙탑=선화공주’, ‘동탑=또다른 무왕의 부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굳이 ‘서동요’ 설화를 버릴 필요가 없다.

무왕 부부묘로 알려져왔던 익산 쌍릉에 대한 100년 만의 재발굴 성과도 눈길을 끌었다. 1917년 쌍릉의 대왕묘 발굴에서 출토된 인골 1개체분(102조각)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의 키가 161~170㎝, 나이는 50대 이상의 남성 노년층, 연대는 620~659년으로 추정됐다. 게다가 주인공을 안장한 나무관이 무령왕릉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다. 그 시대에 이만한 무덤을 조성한 이는 무왕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무왕의 꿈

<관세음응험기>의 기사와,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 무왕과 익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왕은 왜 익산을 염두에 두었을까. <삼국유사>(‘기이·무왕’조)는 “서울의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어머니가 용과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서동이며, 서동은 마를 캐어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고 했다. 이와 관련,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익산 금마면 마룡지 남쪽에 서동 대왕(무왕)의 어머니가 집을 지은 곳이 있다”(‘전라도·익산’)고 썼다. 대체로 ‘무왕=익산 출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무왕 연간, 즉 6~7세기의 정세를 살펴보자. 백제는 551년(성왕 29) 신라 진흥왕(재위 540~579)과 함께 고구려를 치고 한강유역을 양분했다.

그러나 진흥왕은 2년 뒤(553)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 땅 6개군을 점령해버렸다. 분노한 성왕(재위 523~554)은 신라를 치다가(554년) 살해된다. 배신을 당한 백제였지만 신라에 등 돌릴 수 없었다. 고구려의 압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신라간 혼인동맹(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설화로 등장하는 것이다.(최근에는 마한계의 정치적 중심인물인 서동이 백제 왕실의 선화 공주와 혼인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무왕의 선대왕인 혜왕(598~599)과 법왕(599~600)이 재위 2년 만에 잇달아 승하한 것도 심상치 않다.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은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익산에 눈길을 돌렸을 것이다.

이곳에서 스스로를 ‘용의 아들’로 신성시한 후 미륵사를 세워 익산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을 것이다.

백제 8대성(沙·燕·劦·解·眞·國·木·苩) 귀족의 영향력을 피해 사비를 벗어나 익산에서 나름의 정치를 펼칠 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퍼즐

여기서 연구자들의 견해가 ‘천도설’, ‘별도설’, ‘복도설’, ‘경영설’ 등 백가쟁명식 주장으로 갈린다.

이중 천도설은 <관세음응험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인 견해다. 무왕대의 수도는 사비(부여)가 아니라 익산이었다는 것이다. 수도로 읽을 수 있는 ‘수부(首府)’명 기와와 고급 중국제 자기가 출토되고, 귀금속을 취급하는 공방이 드러난 왕궁리 유적이야말로 곧 왕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무왕 말이나 의자왕 초기에 다시 사비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익산 백제’는 600년 무렵부터 무왕 말기 혹은 의자왕 즉위 초기인 641년 전후까지 40여년간 유지된 것이다. 그러나 정사에 기록이 없다는게 취약점이다. 이외에도 왕궁리 유적을 일종의 별궁으로 본 ‘별도설(別都說)’과, 동(익산)·서(부여) 두 도읍이 공존했다는 ‘복도설(複都說)’, 그리고 천도를 추진했다가 포기 또는 철회했다는 ‘경영설’ 등이 등장했다.

<관세음응험기>에 담긴 4가지 퍼즐 가운데 3가지는 이미 맞췄다. 그러나 남은 한가지 퍼즐, 즉 ‘무왕의 천도’는 어떨까. 획기적인 고고자료나 문헌자료가 더 나오지 않는 한 아마도 그 퍼즐은 맞추기 어려울 것인가. (이 기사를 위해 오현덕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전용호 국가유산청 학예연구관, 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오현덕·한광휘, ‘자력탐사를 통한 익산 제석사 목탑에 내리친 낙뢰의 과학적 고찰’, <한국고고학보> 1호, 한국고고학회, 2025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제석사 발굴조사보고서 ⅠⅡ>, 2011·2013

원광대박물관, <익산 왕궁리 전와요지(제석사지 폐기장)시굴조사보고서>, 2006

김주성, ‘7세기 백제에서의 익산 위상의 변화’, <익산 왕궁리 유적의 조사성과와 의의>(제18회 문화재연구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국립문화유산연구소, 2009

홍윤식, ‘문헌자료를 통해서 본 백제 무왕의 천도 사실’, <익산의 선사와 고대문화>,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익산시, 2003

황수영, ‘백제 제석사지의 연구’, <익산의 선사와 고대문화>, 마한·백제연구소·익산시, 2003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익산시, < 유적 따라 이야기 따라 뚜벅뚜벅 익산>(스토리텔링집>, 2016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 익산 왕궁리유적고증연구 기초자료 집성Ⅰ: 고고·역사>, 2024

전용호, ‘익산 황궁성의 구조에 대한 연구 성과와 논쟁점’, <마한·백제연구> 25집,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왕궁리 발굴조사 중간보고 Ⅱ>(학술연구총서 16집), 1997

최완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실체적 접근’, <마한·백제연구> 43집,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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