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美·中 기술 갈등 첨예…韓은 탄핵 정국으로 새 국면
반도체 통상 정책 구체화하고 '반도체 특별법' 통과시켜야
삼성·SK, 컨틴전시 플랜 구축 외에 AI 반도체 기술 개발 매진 필요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국정 운영 불확실성 우려가 가중되는 상황은 피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출범, 중국 저가 물량 공세 등 글로벌 경영 환경을 둘러싼 리스크는 여전히 국내 산업계를 압박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 뿐 아니라 글로벌 통상 전략 수립, 반도체 특별법 통과 등 적극적인 정책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기업들이 경영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는 것 뿐 아니라 AI(인공지능) 중심의 반도체 생태계에 속도전을 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길을 터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내년도 반도체 산업에 영향을 미칠 키워드로 ▲중국 반도체 굴기 ▲트럼프 정부의 통상정책 방향 ▲AI 반도체 생태계 등이 거론된다.
내년 1월 들어서는 트럼프 정부가 중국을 겨냥한 강력한 제재안을 내놓고, 이에 저항하는 중국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국 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미 미 상무부는 삼성·SK가 주도하는 HBM(고대역폭메모리)까지 수출통제 품목에 추가하면서 국내 기업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중국향 HBM 공급이 막히게 되면 매출 감소는 불보듯 뻔하다.
삼성은 구형 HBM 제품 일부를 중국 등에 공급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삼성이 HBM 매출의 약 20%를 중국에서 창출하고 있다"고 했다.
바이든에 이어 트럼프 정부에서 이어질 제재에도 중국의 기술 자립 의지는 쉽사리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의 수출통제로 반도체 장비 등 국산화가 불가피해자, 중국은 반도체 제조장비, 팹리스(반도체 설계), 후공정에 이르기까지 가치사슬 전반 국산화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 D램 1위 업체인 CXMT(창신메모리)는 기존 허페이(Hefei) 외에 베이징을 중심으로 공격적으로 웨이퍼 생산능력을 증설중이며, 주력 제품인 레거시(범용) D램인 DDR4를 저가에 공급하며 전체 D램 가격을 깎아내리고 있다.
중국이 범용 D램 시장을 장악하고, 첨단 D램 기술 개발까지 격차를 좁힌다면 글로벌 메모리 시장은 크게 출렁일 수 있다. 한국기업평가는 "대중 기술 제재 강화로 인한 (중국) 자급률 상승은 수출 판매 기반 위축 및 메모리 공급과잉 부담 확대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산업 약화 우려는 이미 감지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내수·수출의 경제 성장 견인력 동반 약화 우려' 보고서를 통해 우리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경기가 사이클상 하강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최근 들어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가 하락하고 우리 메모리반도체(HSK 854232) 수출 물량이 감소하는 모습, 반도체 내 주력 품목인 D램 가격이 하락하는 등 반도체 사이클 하강 징후가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물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4(6세대 HBM) 등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고, 주요 수요처인 엔비디아가 새로운 GPU(그래픽처리장치) B300 양산을 서두르면서 대외 불확실성 우려는 생각 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HBM의 경우 전체 D램 매출 내 비중이 올해 20%에서 내년 30% 내외로 확대돼 국내 반도체 기업 실적을 견인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내 기업들의 투자도 HBM, DDR5, eSSD 등 AI용 반도체에 집중돼있다.
하지만 미·중 기술 갈등 양상이 내년 이후 더욱 뚜렷해지고 그 불똥이 한국에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워낙 팽배한만큼 대책 수립에 만전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삼성전자는 17일부터 글로벌전략회의를 열고 내년 사업 계획을 논의한다. 전 사업부 모두 복합 위기 타개책을 논의하는 한편 글로벌 경영 환경 변화에 따른 리스크 헤징 전략 등을 언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주 현대차그룹은 해외 권역별 본부장회의를, LG전자는 조주완 사장 주관으로 전사 확대경영회의를 갖고 국내외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내년도 사업 방향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비상대응대책 마련에 힘이 실리려면 정부 글로벌 통상 정책이 선제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과거 박근혜 정부 탄핵 시기에는 반도체 경기 호조로 여파가 제한적이었던 반면, 현재는 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크다.
가뜩이나 환율과 주가가 널뛰기를 하는 상황에서 금융·외환 시장 변동성이 커진다면 기업들의 내년도 투자는 얼마든지 축소 또는 연기될 수 있다.
한국은행은 '비상계엄 이후 금융·경제 영향 평가 및 대응방향' 보고서에서 "과거 탄핵 국면에는 중국의 고성장(2004년), 반도체 경기 호조(2016년) 등 우호적인 대외여건이 수출개선을 통해 성장세를 뒷받침했으나 이번에는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 증대, 주력 산업의 글로벌 경쟁 심화 등으로 대외 여건의 어려움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지적한 통상 환경 불확실성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공급망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한·미 등 통상관계를 탄탄히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중국 투자 리스크, 미 반도체 보조금 확정, 국내 반도체 클러스터 개발 등에서 정부가 신속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반도체 특별법을 통과시켜 기업들이 경쟁력 개선에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기업 근로자들의 경우 주 52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보조금 등 재정 직접 지원을 골자로 한다.
업계는 대내외 경쟁환경이 심화되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현행 근로시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정부에 전달해왔다. 그러나 기존 제도로도 노동시간 유연화가 가능하다며 '노동시간 규제 완화' 조항에 반대해온 민주당이 이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교육원장은 "정부에서는 경제팀을 중심으로 통상 전략을 구체화하고, 국회에서는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며 "기업은 AI 반도체 중심 기술 개발에 성과를 내 중국과의 격차를 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빠른 연산반응 속도, 저전력 설계 등이 강점인 추론(Inference)용 반도체를 확장시키고, 온디바이스 AI(On-Device AI) 전략을 스마트폰 뿐 아니라 가전, 스마트홈, 자율주행차, 드론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