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율주행·로봇·인공지능(AI)의 발달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는 가운데 한국은 메모리 쏠림 현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시장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주류인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한국이 경쟁력을 발휘하기 위해 연구개발(R&D)의 토대가 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인프라를 구축하고 우수한 인력이 유입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일 PwC컨설팅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비메모리 점유율은 단 2%에 불과했다.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합산한 전체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17%로 미국(51%)에 이어 두 번째로 높지만 비메모리의 경우 미국·유럽연합(EU)·중국·일본·대만보다 점유율이 한참 뒤떨어졌다.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이 전체 반도체 시장의 24%를 차지하는 메모리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도체 강국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막상 글로벌 칩 시장의 76%를 차지하고 있는 비메모리 영역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셈이다.
비메모리는 주로 시스템반도체를 일컫는다. 메모리가 정보기술(IT) 기기 안에서 기억과 저장을 맡는 장치라면 시스템반도체는 인간의 ‘두뇌’처럼 연산을 하거나 전력을 관리하고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최근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엔비디아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생산하는 퀄컴 등이 대표적인 비메모리 회사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종류가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산업군에서 필요로 한다. 2022년 말 미국 오픈AI가 챗GPT를 공개한 뒤 AI 반도체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며 비메모리 반도체는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AI용 비메모리 특수를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세계 톱10 안에 드는 한국 업체는 단 한 군데도 없다. 퓨리오사AI와 리벨리온, 딥엑스 등 AI 반도체 시장에 도전하는 한국 스타트업이 있지만 아직까지 눈에 띄는 수주는 없고 기술 경쟁력도 주요 빅테크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 ‘붐’이 일어난 중국은 3000개 이상의 반도체 설계 업체들이 활발한 제품 R&D를 진행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국 시스템반도체 설계 회사가 200개 이상 있다고 하지만 최신 산업과 연계해서 유의미하게 움직이고 있는 기업은 15개 내외”라고 평가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을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은 인력이다. 국내 최대 반도체 설계 회사인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의 반도체 R&D 인력은 1만 2000명 안팎인데 라이벌 회사인 미국 퀄컴의 인력은 4배 이상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로 인력이 편중되면서 중견 칩 설계 회사들은 ‘카드 돌려막기’ 식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회사들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만한 파운드리 공정이 부족한 점도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 삼성전자·DB하이텍·SK키파운드리 등 파운드리 회사가 있지만 첨단 공정 중심이라 중소 회사들이 활용할 구형 공정이 없어 물량을 맡기기 어렵다”고 전했다.
많게는 1000억 원 가까이 들어가는 최신 AI 기술 반도체 개발 비용 부담도 적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AI 반도체 생태계 육성을 위해 개발비의 20~30%가량을 지원할 정책 마련이 절실하다”며 “해외 설계 전문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인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