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지난겨울 계엄 이후 내 시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한국 친구들과 단절된 채로 스스로 판단해야 했던 고립된 시간이 사고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내부 분열을 겪는다는 것과 그렇게 되도록 조작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반복됐다는 것을 자각했다.
전쟁 위협이 실재적이었다는 점도 컸다. 가자지구 학살과 우크라이나전의 여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다른 어떤 운동보다 전쟁을 막는 일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
분단국가라는 명백한 사실 역시 뒤늦게 의식했다. 한국사의 많은 부분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로 묻혀 있고 북한·러시아·미국과 관련한 소식은 각 언론 매체와 오피니언 리더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편집되며 발화됐다. 우리는 언제나 미스터리와 의혹이 가득한 상태에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해킹을 시도했고 선관위가 국정원 점검을 거부했다는 당시 대통령 발언은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례를 봤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16년 러시아가 트럼프 당선을 돕기 위해 미 대선에 개입했다고 공식 발표했고, 한국 국정원도 2020년 북한이 여론 조작과 악성코드 배포를 포함한 사이버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사이버전의 목적은 단순한 정보 탈취가 아니라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지난겨울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분열은, 그런 의도를 실감케 했다.
윤석열씨의 발언은 일부 사실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단순한 허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 위험했다. 그 말의 진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절반의 진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소비되고,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였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발언의 배경, 정보의 출처, 기관 간 권한 구조, 그리고 윤 정부의 일관된 패턴까지 모두 고려해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계엄 이후 언론과 소셜미디어에 쏟아진 내용은 분노가 가득한 것들이었고 이를 살펴보려는 시도는 그걸 행하고 있는 나조차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떤 관점을 더 살펴볼 기회를 주지 않을 때 그의 말에 설득된 사람들이 찾아가게 되는 곳은 바로 윤석열씨 스스로 제안한, 극우 유튜브다. 그곳에선 더 위험한 방식으로 하나의 논리와 정합성을 갖춘 입장이 확장되고 있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몇번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떤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 중 누구도 절대적인 진실을 독점하고 있지 않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알고 싶은 것은 이제 어떤 관점이 진실이냐보다, 어떤 관점이 언제 위험해지냐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 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인간을 향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제도다. 이 신뢰는 모든 정치적 견해를 향한 것이다. 힘을 써서 타인을 내 쪽으로 끌어들이는 제도가 아니라 그 힘을 분배해 타인이 스스로 결정하게 만든 제도다. 그렇게 내려진 각각의 진실을 존중하며 나아가기로 한 제도다.
나는 뒤늦게서야, 민주주의를 말한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는지를 체험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믿음을 이어받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