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카 와일드는 삶의 끈질긴 문제로 ‘권태’를 꼽았다. 그런데 권태는 시간과 연관된다. 인간은 일상이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면에서 외로움보다 더 고질적인 게 권태다. 간헐적인 외로운 감정에 비해 권태는 시간과 밀착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시간을 마비시킨다.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양의 끝』에서 무인도에 홀로 생존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말.
“나날들이 비슷비슷해져서 내 기억 속에서는 서로 정확하게 포개지고 (…) 똑같은 날을 끊임없이 다시 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등 시간을 탐색하는 철학자들에게 종종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김없이 지나가는 순간들의 기계적 수열 속에 홀로 살아가다 보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시간은 가지만 내게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역동이 감지되지 않는 것. 이럴 때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수퍼 리얼’한 뮤익의 인체 조각
권태로운 반복 작업 거쳐 탄생
관객은 타자 만나 권태 벗어나
호주 출신, 영국 기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 1958~)의 작업은 특히 그 제작 과정에서 이러한 집요한 권태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그의 전시는 53만여 명이나 관람했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놀랍도록 정교한 그의 인체 조각은 그 형상과 재질이 실재보다 더 실제적이라 관람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충격 가치(shock value)’라는 말을 낳은 영국의 현대미술답다. 그런데 이 경우의 충격은 기나긴 권태의 굴레를 견디고 마침내 극복해 나온 결과라 봐야 한다. 작업의 제작 과정이 유난히 힘들고 각고의 인내가 필요한 것.

작가는 새로운 조각기법을 창안한 것도, 요즘 흔한 첨단 디지털을 활용한 것도 아니다. 순전히 전통적 방식으로 일일이 수작업을 한다.(사진 ①) 작품 한 점에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데, 현존하는 완성작이 단 50여 점에 불과한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뮤익의 작품은 이렇듯 긴 시간 동안 반복되는 동작으로 극도의 정교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그의 작업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야말로 ‘권태로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서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저 엄청난 권태의 무게를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 뮤익을 오래 지켜본 사진작가 겸 영화감독 고티에 드블롱드가 일종의 답을 주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오랜 시간 뮤익이 작업하는 모습을 찍으면서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변화가 생기고 “그 순간에 조각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작가 자신도 모르는 그 변화의 순간, 화룡점정과 같은 마지막 동작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의 반복 위에 얹히는 것이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으로, 뮤익의 반복적 시간에 변화를 가져오며 계속되는 권태의 굴레를 깨는 것은 ‘타자’의 개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조각은 다양한 사람들의 인체를 다룬다. 예외적으로 자소상을 만든 적도 있지만 거의 타인들의 신체인 것이다. 특히나 얼굴은 너무나도 정교해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타자성을 보여준다.(사진 ②)
레비나스는 똑같은 나날로 이뤄진 정적인 시간에 흐름을 일으키고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타자(타인)’의 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방드르디』에서 크루소에게 시간의 발생을 가능하게 한 것도 타인의 등장이라는 점. 그리고 레비나스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얼굴’로서 현현한다고 말하며,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은 우리 주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 차원으로 이끈다고 설파한다. 즉 타자의 이질성이 고집스런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벗어나게 하면서 비로소 권태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수공의 제작 기술로 눈앞에 구현된 수퍼 리얼한 뮤익의 인체조각은 경이롭고 낯선 감정을 자아낸다. 너무도 ‘일상적인’ 조각 앞에서 타자의 실제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는 점. 우울하고 의기소침하고 불안하고 화가 난, 혹은 무관심한 그런 얼굴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지극히 ‘사적인’ 우리의 이웃, 할머니, 동생, 친구, 아저씨의 얼굴이다. 동시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초상이다.
뮤익의 작업에서 대면하는 타자의 얼굴로 우리는 자신으로만 향하던 주체의 인식을 외부로 돌리게 된다. 비로소 권태의 진정한 대상인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