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 史淵]1919년 4월10일의 장소성, 대한민국 뿌리 찾기

2025-11-03

상하이시 황푸구는

진션푸로 22호의 서양 가옥

대한민국 국호 확정한

기념비적 장소로 특정

이광수가 ‘나의 자서전’서

제1회 임시의정원

열었다고 묘사한 장소와

필자가 찾아가 확인한

진션푸로 22호 인상과 유사

따라서 첫 번째 임정업무

그곳서 보았을 가능성 높아

미궁 속의 그곳을 포함해

장소에 대한 종합 접근으로

정부 수립 80주년 때까진

상하이의 임정 주소지

모두 해명했으면 좋겠다

이번 여름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 탐방 기회가 많았다. 그중 MBC와 함께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했다. 상하이를 방문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러봤을 곳을 필자도 찾아다녔다. 그리고 임정과 관련해 한국인이 많이 가지 않는 곳도 다녀왔다. 그곳은 1919년 4월10일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확정한 기념비적인 장소라고 상하이시 황푸구가 특정한 장소다.

중국 측의 의견대로 하면 그곳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상하이에 가는 한국인 숫자에 비해 그곳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정 하면 마당로에 있는 청사만 기억한다. 왜 그럴까. 현행 역사 교과서도 4월10일의 기념비적 장소에 관해 왜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을까.

거기에는 매우 큰 기억의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간극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만 있지 않고 우리 안에도 있다. 교과서 집필자인 필자는 찜찜함을 풀지 못하고 귀국해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았다. 여전히 미궁 속이지만 4월10일의 역사적 장소를 찾는 종합 조사를 기대하며 소견을 낸다.

‘대한민국’ 작명한 장소 확정이 복잡한 한국

상하이를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마당로에 있는 임정 청사를 한 번은 찾아갈 것이다. 그곳은 1926년부터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까지 있었던 ‘상해 임정’의 마지막 청사다. 그런데 그곳을 방문한 많은 한국인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청사(사무소)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첫 번째 사무소는 어디였냐고.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을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했지만, 게다가 광복 80주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이 의문을 해명하려는 움직임은 그때도 지금도 없다.

지금까지 상해 임정이 위치한 당시 주소지와 현재 지점을 특정한 경우는 두 곳 있다. 당시 지명으로 말하면 민단 사무소가 있었던 창안리 267호의 가옥 터와 하비로 321호의 가옥 터가 그곳이다(<근현대 상해 한인사 연구>). 전자는 1919년 4월 어느 날부터 8월까지 이미 사용 중이던 사무소를 같이 쓴 곳이고, 후자는 8월부터 10월17일까지 안창호의 진두지휘로 임차해 쓴 곳이다. 임정 요인들은 특히 후자에 있던 청사를 찍은 사진을 엽서로 제작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정청(政廳)’이라 표기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이 둘보다 앞선 시기인 4월10일 이후, 곧 첫 번째 임정 사무소로 사용한 곳이 있었다는 자료들이 있다. 문제는 자료들이 가리키는 곳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최초의 임정 청사를 가리키는 두 흐름의 자료에 연결점이 없어 합쳐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나는 ‘하비로 460호’를 말하는 자료가 있다. 이곳은 오늘날 상하이시 화이하이중로(淮海中路)와 루이진얼로(瑞金二路)가 만나는 사거리 근처다. 일본 경찰의 정보자료도 있지만, 1919년 4월10일 회의에 참석한 여운형이 체포 후 경성에서 반복해 진술한 내용이 있다. 그는 하비로에서 회의가 열렸다고 네 차례 진술했다. 특히 1929년 8월 경성지방법원 검찰국 신문 때 검찰이 몇호였냐고 질문하자 ‘460 몇호’였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여운형 재판의 증인으로 심문받은 조동호도 자신이 하비로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확정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한 회합이 있었던 곳의 길 이름을 ‘하비로’라고 일관되게 기억했다.

다른 하나는 4월10일 밤 10시부터 열린 회의의 장소가 진션푸로(金神父路), 곧 오늘날 루이진얼로였다는 기록이 있다. <제1회 임시의정원기사록>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기사록에는 이번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 칭한다고 29명의 참가자들이 합의했고, 이어 국호와 임시헌장 등등을 결정했음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만 장소를 언급하면서 진션푸로 몇호인지를 기록하지 않았다. 제3회 임시의정원 회의 때까지 그랬다. 정말 안타까운 점이다.

필자는 1919년 시점에 당사자들이 정리한 공식 ‘기록’인 후자를 더 신뢰하고 싶다. 여운형과 조동호의 진술은 시점상 10여년이 지났다. 게다가 경찰과 검찰의 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기억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비로 460호설을 완전히 폐기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의 언급이 일관된 데다 10여년 전의 장소를 거짓 진술할 만한 이유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4월10일 첫 회의의 장소이자 임정의 청사와 관련한 곳에 대한 자료들 속에서 어떤 접점을 찾기 어렵다 보니 한국의 관련 학계와 기관에서도 오랫동안 논의를 진행하지 못했다. 이에 따른 후과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때 국회의원들이 상하이에 직접 가서 임시의정원 회합을 재현하는 세리머니를 할 때 드러났다. 의미 있는 재현 행사를 역사적인 장소에서 하지도 못한 것이다.

강력하게 장소성 제기한 상하이시 황푸구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던 한국과 달리 상하이시 황푸구는 특정 장소를 매우 구체적으로 확정해서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도 한국이 임정 수립 100주년 행사로 떠들썩할 때보다 3년이나 앞선 2016년에. 황푸구는 진션푸로 22호, 곧 오늘날 루이진얼로 50호에 현존하는 서양식 가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 구지(舊址)’라고 특정하고 ‘문물보호점’으로 지정한다는 안내판을 QR코드와 같이 설치했다.

그런데 황푸구의 안내문처럼 22호 가옥에 의미를 특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22호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일본 경찰의 정보자료도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회의에 참가한 29인 가운데 22호를 특정한 사람도 없다. 황푸구도 근거 자료와 결론에 도달한 논의 과정을 지금까지 공개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22호가 제1회 임시의정원이 열린 곳이고, 임정 사무소였다는 입장에서 일단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4월10일 회의 참가자 가운데 주소지가 진션푸로 22호인 사람은 현순 목사뿐이다. 물론 그는 또 다른 주소지에도 머물렀다. 현순은 3·1운동 당시 33인의 일원인 최린, 이승훈이 제공한 독립선언서와 자금을 갖고 상하이에 온 사람이다. 하여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의 회합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었고, 거처를 정하는 데도 나름 자금에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사용하기 위해 그 큰 집을 임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중국의 글들에 따르면, 현순이 머문 22호는 천주교 삼덕당에서 소유한 건물로 1912~1918년 사이에 건축된 서양식 3층 가옥이었다. 실제 이 일대는 1914년 프랑스 조계지에 편입되며 프랑스식 가옥이 많이 신축된 신시가지였다. 오늘날에도 22호 주변에 당시 신축된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2호는 오늘날처럼 연립형 3층 가옥이었음이 1920년 프랑스조계도(圖)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황푸구도 이들 건축물을 ‘우수 역사건축 및 문화재 보호 지점’으로 지정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7월31일에 22호 내부를 살펴볼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 그때 생활 공간으로 사용 중인 3층을 제외하고 1·2층 내부의 방들과 테라스 등을 살펴보았다. 이때 필자가 확인한 인상과 이광수가 <나의 자서전>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이 개회한 장소를 묘사한 언급을 연결지어 보겠다. 현순과 이광수 등은 임정의 ‘정청’으로 쓰기 위해 ‘삼백원이나 세를 주고 얻은 꽤 좋은 프랑스 조계의 양식 주택’을 마련했다. 목조 및 벽돌 주택인 22호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잘 보존된 ‘꽤 좋은’ 건물이어서 당시에도 임대료가 높았을 것이다. 또한 필자는 이광수의 설명처럼 22호에 ‘잔디를 심은 뜰’이 넓게 있었겠다는 사실과 방이 여럿임을 확인했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위해 ‘모인 방은 이층 동쪽 기름하게 생긴 방’이라는 공간 묘사와도 딱 어울리게, 22호 주택에는 오늘날에도 서쪽이 아닌 동쪽 2층에 각이 없고 둥글며 매끈하게 생긴 공간이 있다. 그래서 22호를 처음 본 독립임시사무소 사람들이 ‘하비로 난잡한 집’과 비교해 놀랐다는 이광수의 회고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독립임시사무소와 22호는 걸어서 20~30분 정도 거리였다.

이광수의 회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임정 청사로 사용하기 위해 빌린 서양식 주택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을 개원했다는 사실이다. 재정 부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두 조직의 청사를 각각 운영할 생각이 없었다. 민단 사무소와 하비로 321호에서 두 조직이 공간을 공유했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해 준다. 이렇게 보면 독립운동가들은 22호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 등을 열었고, 매우 짧지만 첫 번째 임정 업무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민단 사무소와 하비로 321호는 두세 번째 청사의 주소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장소에는 맥락이 있다. 맥락을 짚어내는 출발은 사실 규명이고, 그래야 기념할 수 있다. 기념은 공감과 연대 의식을 자극하며 기억을 강화한다. 그게 기억을 관리하는 역사정책의 기본이다. 1919년 4월10일 회의 장소에 대한 해명과 의미 부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전히 미궁 속인 그곳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확정하고 민주공화제를 처음 천명한 임시헌장을 제정한 곳이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본 외형과 중핵의 속살을 규정했다고 볼 수 있는 특별한 장소다. 좀 더 적극적인 접근이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기본 태도다. 장소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이 출발이었으면 한다. 내년부터 2030년까지 100주년 기념이나 몇십주년을 기념해야 하는 역사가 매년 있다. 휘발성 이벤트로 소일하는 안이함을 반복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무리 늦어 2028년 정부 수립 80주년 때까지는 상하이의 임정 주소지를 모두 해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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