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폭발적인 혁신, 창의성의 나라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관세정책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럽지만 한국은 창의성으로 무장한 ‘K자본주의’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석학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는 최근 화상으로 진행한 서울경제신문 창간 65주년 특별인터뷰에서 한국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한 것은 ‘2단계 발전 과정’ 덕분이라며 이같이 평가했다. 로빈슨 교수는 “한국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중요한 시기가 있었다”며 “첫 번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라고 운을 뗐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산업화와 수출, 산업 발전에 힘쓴 시기로 그 기간의 정책이 효과적이었다는 증거가 많다는 것이다. 로빈슨 교수는 사회 제도가 국가 번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공로로 지난해 10월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인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등과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특히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어떻게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뤄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만큼 한국 경제 발전사에 정통하다. 로빈슨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다양한 정책을 어떻게 시행했는지, 또 사람들이 일을 하도록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했다”며 “가령 박 전 대통령은 현대그룹이 조선업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조선업에 진출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지금과 같은 조선업 강국이 탄생했다. 정말 흥미로운 사례”라고 평가했다. 단적인 예로 한미 무역 협상 타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역시 뿌리는 박 전 대통령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의 민주화라는 정치적 전환점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경제적 성취는 없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로빈슨 교수는 “1980년대 혁신 관련 데이터, 특허 출원 관련 수치 등을 보면 1980년대까지는 거의 제로 수준이었는데,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며 “이는 박 전 대통령 체제의 권위주의 시대에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960~1970년대 국가 주도형 정책으로 경제 전반의 기반을 닦은 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혁명 이후 창의적 경제로 전환해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게 그의 견해다. 로빈슨 교수는 “내가 오늘날 한국에서 목격하는 것은 놀라운 혁신과 창의성의 폭발”이라며 “한국을 보면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과 창의성이 넘쳐 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말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은 ‘재앙’이었다고 로빈슨 교수는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소식은 한국 사회가 그에 대해 저항했고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며 “만약 계엄령이 이어졌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 전망에 매우 나쁜 소식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몇 년째 이어지는 한국 경제 비관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로빈슨 교수는 영국 출장길에 우연히 들렀다가 깊은 인상을 받은 한국 화장품 상점 사례를 소개하며 이 같은 비관론을 불식시켰다. 그는 “한국은 K팝과 같은 문화 현상을 통해 거대한 화장품 산업을 발전시켰다”며 “한국은 K팝을 기반으로 화장품 산업 분야에서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게 바로 혁신이고 한국의 창의성으로 무장한 K자본주의”라며 “한국은 분명히 차세대 혁신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과 같은 최첨단 분야에서 한국이 뒤처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경제학 원칙 중 하나는 모두가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며 “AI와 같은 최첨단 분야에서 앞서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 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로빈슨 교수는 “한국의 데이터나 혁신, 연구개발(R&D) 지출, 특허 출원 등의 데이터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혁신 측면에서 놀라운 수준”이라며 “한국의 성장 모델은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만큼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분야에서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신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한국의 R&D 지출 비중은 5.0%로 이스라엘(6.3%)에 이어 회원국 중 2위를 기록했다. 3위는 스웨덴으로 3.6%, 4위는 3.4%인 미국이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보다 혁신성 측면에서 크게 앞서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로빈슨 교수는 “일본은 매우 성공적이고 번영하며 기능적인 사회”라며 “문화와 전통을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존해왔고 그게 큰 성공이라 생각하지만 지난 20년간 정체된 느낌”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일본 경제를 들여다보면 혁신성 측면에서 한국과 같은 폭발적인 혁신은 보이지 않는다”며 “특허 출원 데이터만 비교해도 한국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다”고 말했다. 특허청에 따르면 한국의 국제특허출원(PCT) 출원은 지난해까지 27년 연속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일본이 전년 대비 1.2% 줄었지만 한국은 오히려 7.1% 늘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내면서도 긴 호흡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로빈슨 교수는 “한국과 미국은 70년 이상 굳건한 친구이자 동맹이었다”며 “한국도 미국을 필요로 하고 미국도 한국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한국이 인내심을 갖고 장기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진하고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며 “북한이라는 매우 공격적이고 확장주의적인 독재 정권을 맞대고 있고 중국이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지만 어려운 상황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한국 경제에 대한 총평을 요청하자 로빈슨 교수는 “한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 성공 사례 중 하나”라며 “모두가 한국이 어떻게 그런 성과를 달성했는지, 어떻게 사회를 그렇게 변모시켰는지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만약 세계의 모든 가난한 국가가 한국이 지난 50~60년 동안 성취한 것을 이뤄낼 수 있다면 세상은 매우 다른 곳이 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