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호모커뮤니쿠스] 조용히 강한 말씀

2025-02-02

근래에 오는 눈은 폭설인 경우가 잦다. 강설량을 측정한 이래 최고 적설량을 기록하는 지역이 속출한다. 길인지 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대설이 내리니 눈 치우는 작업과 재난 안전 대책이 우선이다. 눈으로 출퇴근 혼잡, 낙상 사고, 교통사고, 인명 손상이 발생하니 피해와 예방에 집중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눈길을 걷거나 눈 위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니 눈에 얽힌 추억과 낭만이 생길 틈이 없어진 거다.

꽤 오래전 이야기다. 백설 위에 두 팔을 마음껏 펼치고 뒤로 벌렁 누웠다. 폭설이 내린 선자령 벌판이었다. 푹신했다. 기분도 마음도 날 듯이 편했다. 하늘의 표정도 솜이불처럼 포근했다. 마음속으로 별러왔던 영화(‘러브 스토리’) 장면의 재연이었을 지도 모른다.

명문가 부호의 아들인 ‘올리버’(라이언 오닐 분)와 이민 가정의 가난한 여성 ‘제니퍼’(앨리 맥그로 분)의 ‘눈 같은 사랑’. 백혈병으로 죽는 슬픈 스토리지만 여주인공의 죽음마저도 사랑을 더욱 진정하게 했다. 둘은 흰 눈을 손에 뭉쳐 눈싸움하며 마음껏 깔깔거리고, 눈 위를 뒹굴며 눈사람이 되어 사랑했다. 그 눈과 그 사랑은 녹지도 잊히지도 않고 감동으로 마음속에 남았다. 눈 위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스크린을 채운 순수한 사랑의 모습이 관객의 마음을 그토록 채울 수 있었을까. 눈과 함께여서 사랑의 낭만에 절절한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리라.

눈에 얽힌 사연이 없는 이가 있을까. 이제 와 생각하면 큰 비밀도 아니련만 둘이서만 가슴속에 담았다. 대개는 첫눈이 오면 서로가 아는 어떤 장소에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우리가 학교를 졸업할 때, 혹은 우리가 대학생이 되고 또는 무엇이 되어서 첫눈이 오는 날에 만나는 거였다. 현재의 지속을 희망하고, 더 성숙해진 우리를 꿈꾸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그렇게 눈은 우리를 소망하게 한다. “눈이 오는 날엔/ 고향에 가고 싶어요… 조용한 친구를 만나서/ 무슨 말이든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싶어요… (중략) 바닷가로 난 고향 찻집 ‘솔잎’에서/ 따끈한 차를 끓여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마시고 싶어요./ 창밖엔 눈이 더 내려 쌓이는데/ 둘이서는 마주 보며 … 툭-툭 눈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눈 오는 날 2’, 정대구)

눈은 부드럽지만, 조용히 강한 힘을 지닌다. 눈이 많이 오면 골짜기 골짜기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나무 꺾이는 소리 때문에 깊은 밤 산사의 스님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뿐사뿐 내리는 무게감조차 없는 가벼운 눈이 모인 눈송이에 덮여 장대한 나무들이 부러지기 때문이다. 책 ‘무소유’의 ‘설해목’이라는 수필에 있는 법정 스님의 조용히 강한 말씀이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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