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작품상 후보군
<7>브루탈리스트
2차대전 유대인 건축가의 여정
인터미션 포함 3시간 35분 상영
애드리언 브로디의 인생 명연기
건축 예술의 본질에 진지한 접근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지금의 스튜디오 시스템하에서 3시간 35분짜리 영화가 극장가에 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스탠리 큐브릭,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감독들이 제작사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았던 시대에나 가능했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왜 올해 가장 강력한 오스카 작품상 수상 후보로 지목되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필름메이커가 이루기 힘든 업적이다.
2024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 ‘브루탈리스트’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브래디 코벳 감독(복스 룩스)의 픽션이다. 독특하고 장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영화로 시대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70mm 필름으로 촬영됐다.
20세기 중반 등장한 ‘브루탈리즘’은 거칠고 꾸밈없는 건축 양식을 말한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를 있는 그대로 활용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스타일로 콘크리트가 노출되어 요새처럼 보이는 건축물들이 그 대표적 예들이다. ‘야수적인, 잔혹한’이란 뜻이 담겨 있는 프랑스어 ‘Beton brut’에서 유래됐다.
영화는 건축 예술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해 간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이 영화에 담긴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건축이 사람들과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깊은 영향을 탐구하면서 건축가와 2차 대전 사이의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만큼 건축 예술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영화는 드물다.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라슬로 토트(애드리언 브로디)는 브루탈리스트 건축가이다. 2차 대전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그는 부다페스트에 아내 에르제베트와 조카딸 조피아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먼저 이민 온 사촌 아틸라와 그의 미국인 아내 오드리의 집에 머무른다.
라슬로와 아틸라는 대부호 해리슨 리 밴뷰런(가이 피어스)의 아들 해리로부터 아버지의 사설 도서관 재건축을 의뢰받는다. 출장에서 돌아온 해리슨은 아들의 경솔한 결정에 분개하며 라슬로와 아틸라를 쫓아낸다. 라슬로와 오드리 사이를 불편해하던 아틸라는 라슬로에게 집을 떠나라고 말한다.
수년 후 노숙자 수용소에서 룸메이트 고든과 가난하게 살고 있는 라슬로. 고든은 라슬로가 헤로인 중독에 빠져 있음을 발견한다. 한편, 라슬로가 작업한 도서관 디자인이 건축계의 극찬을 받자 해리슨은 라슬로를 다시 찾아와 그를 고용할 생각으로 제법 큰 액수의 돈을 놓고 간다. 라슬로와 고든은 그 돈을 헤로인으로 소진해 버린다.
유럽에서 뛰어난 건축가로 활약했던 라슬로의 과거가 밝혀지고 해리슨은 고인이 된 어머니를 기념하는 커뮤니티 센터 건축을 의뢰한다. 해리슨의 도움으로 아내와 조카를 헝가리에서 데려온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내와 벙어리가 된 조카와의 6년 만의 재회. 센터 건축과 관련, 해리와 마찰이 잦아지고 결국 해고당한다. 조피아를 성희롱하는 해리.
또 수년이 지났다. 라슬로는 필라델피아의 건축 회사에 취직해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조피아는 유대교 남편을 만나 임신을 하고, 라슬로 부부에게 새로 건국한 이스라엘로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부부는 조카의 제안을 거절한다.
해리슨이 찾아와 또 다시 대형 프로젝트 설계를 제안한다. 두 사람은 카라라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해리슨과 라슬로는 파티를 벌이고 술에 취한다. 해리슨은 자신의 우월감을 보여주기 위해 라슬로를 강간한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라슬로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미국은 브루탈리스트 건축가 라슬로에게 가혹했고, 그의 아메리칸 드림은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다. 영화는 전후 미국을 잔인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에 의해 라슬로가 지속해서 처하게 되는 예술가의 곤궁을 잔혹하게 그린다. 가난한 예술가 라슬로에게 40년대의 미국은 브루탈(brutal) 그 자체였다. 코벳 감독이 왜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양식을 라슬로의 삶과 연결하려 했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다.
코벳 감독은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사조와 반유대주의를 플롯의 중심에 깔고 유대인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전쟁에 얽힌 서사를 ‘잔혹하게’ 풀어간다. 라슬로의 아메리칸 드림과 예술에의 열정은 어둠과 편견에 갇혀 있다.
라슬로는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수많은 이민의 혼합체이다. 그들은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착취당한다. 그리고 그들의 빈곤은 늘 모욕을 동반한다. 라슬로는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헤로인 중독에 빠진다.
해리슨은 부의 상징적 캐릭터다. 그는 라슬러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그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호의를 베푸는 건지, 베푸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늘 모호하고 자비로운 것 같으면서 인색하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2002년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작 ‘피아니스트’에서의 연기를 능가하는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배우가 캐릭터에 녹아 들어간 듯한 그의 연기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라슬로처럼 모든 걸 잃어버리고 헝가리를 떠나야 했던 그의 어머니가 모티브가 됐다. 유대계인 브로디는 자신의 개인사에서 어머니를 상기하고 그 이미지를 허구적 캐릭터 라슬로에 반영했다.
‘LA컨피덴셜’(1997)과 ‘메멘토’(2000)로 기억되는 배우 가이 피어스는 호감과 비호감을 동시에 표출하는 캐릭터 해리슨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대립적인 두 중심 캐릭터를 연기하는 브로디와 피어스는 각기 오스카 남우주연상과 조연상 부문의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슬로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사실 세트 디자이너 주디 베커의 작품들이다. ‘캐롤’과 ‘아메리칸 허슬’로 잘 알려진 그녀의 프로덕션 디자인 역시 오스카상의 강력한 수상 후보다. 영화는 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작품상을 비롯한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시카고비평가협회에 의해 ‘올해의 영화’로 선정됐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